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믿음.
의심이 시작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을 의심하는 순간 이미 마음은 지옥이고, 스스로 피폐해지게 된다.
그런 시한폭탄과도 같은 의심은 내 주변 일상에서 호시탐탐 터질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 순간은 크게 한방 올 수도 있고, 스멀스멀 조용히 침투할 때도 있다.
나에게는 후자 쪽. 잔펀치를 여러 번 맞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잔펀치도 많이 맞다 보면 훅 가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의심은 왜 생기는 걸까?
뜻밖의 소식을 들었을 때, 특히 직접이 아닌 간접적으로 전달받았을 때, 사실을 알기 전에 짐작을 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은 아이러니하게 진실성이 대단히 크다.
의심하는 순간, 이미 나는 호구가 되어있고, 세상 바보스러울 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
첨엔 분노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호구인 내가 한심스럽게 되고 결국 세상 억까가 돼버리고 만다.
그러면 또다시 의문. 이런 생각은 왜 드는 것일까?
나는 이미 준비성도 철저하게 호구가 될 준비도 바보가 될 준비도 진즉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본 의심과 억까들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찾았던 것이다.
난 어릴 적부터 야무지지 못했다. 엄마가 말씀해 주신 일화를 들으면 모든 게 다 증명된다.
어릴 적 동생은 엄마 등에 업혀가고 나는 걸어서 엄마를 따라가고 있으면 엄마는 귤을 나와 동생에게 하나씩
쥐어주셨다고 한다. 한참을 가다가 서서 등뒤에 업혀있던 동생을 봤더니 이로 뜯어 귤을 열심히 까서 먹고 있었는데 걸어가던 나는 어땠을까? 엄마가 준 귤을 손에 쥔 채 그대로 걷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생은 지금도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야무진 반면, 나는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건드려서 잘못될까 매사가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어쩌면 어린아이가 걸으면서 귤을 까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엄마가 까주겠지' 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동생보다 나이가 많았던 나는 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까달라고 투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심은 곧, 많은 생각들 속에서 키워진다. 유난히 생각이 많은 나는 더 많은 의심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걱정 중 80%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는데, 의심은 걱정을 먹고 쑥쑥 자라난다.
또, 그 걱정은 불안이라는 친구도 동반한다.
분명, 믿음이라는 씨를 뿌렸는데 의심이라는 씨앗이 자라나 수많은 걱정과 불안의 열매를 맺는다.
귤을 들고만 있었다던 어릴 적 나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믿어야 했다.
엄마말만 듣고 난 융통성도 없고 야무지지 못한 사람으로 나 스스로에게 각인되어있었던 것 아닐까?
귤을 얌전히 들고 가던 어린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까달라고 안 했던 거지?, 넌 참 착한 아이구나.."
난 그때부터 나를 의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성장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나를 믿지 못했기에 불행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이겨내는 것이 힘들었다.
의심과 억울이 나에게만 계속된다고 생각될 때 나를 믿어야 한다.
나에게도 정당한 이유가 있고 나를 믿는 만큼 불행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