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가끔 소설을 읽고, 시를 들춰 본다는 행위는 굉장히 무용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무용할 수도 있겠구나 정도랄까. 잘 쓴 소설이든, 못 쓴 소설이든 읽고 나서 달라지는 점은 하나도 없다. 실용서나 자기계발서라도 읽으면 '업무에 이렇게 적용해봐야겠군', '이렇게 살면 성공하나?'정도 느낀 점이나 의미를 전달받지만, 소설은 전혀 다르다. 굉장히 잘 쓴 소설일수록 고생해서? 아니면 신나게 읽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하루키 소설이 그랬고, 이번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가 그렇다.
다 읽고 나면 줄거리나 주인공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읽는걸까? 여전히 문학과 픽션은 왜 중요할까? 많은 유명 소설작가가 이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내가 받은 그들의 메시지는 '세상에는 이성과 과학, 응당이 가득 차 있다. 응당 이래야 한다, 저렇게 된다. 1+1은 2다.'로 가득차있다. 모든 걸 이성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원인과 결과를 풀어내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포함한 문학 작품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
최근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TV 피플'과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는 이성과 과학의 반대편에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TV 피플은 도쿄에 살고 있는 직장인 젊은 유부남이 집에서 멍하니 있는데 TV에서 사람들이 나온다. 3명이 나오고, 무의미한 이야기가 전개되다 결국 자신도 TV 피플이 된다. 이게 뭔 말이람? 하루키는 뭘 말하고 싶은거야? 'TV는 조심해야 한다. 하마터면 먹힌다' 혹은 'TV만 보고 있다가는 TV 속 세상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무의미의 축제도 비슷하다. 몇며 주인공들의 일련의 무의미한 사건이다. 여성의 배꼽을 두고 새로운 미학적 기준인가 하는 잡생각도 했다가 이리저리 재미없는 연극 속 주인공들처럼 대사를 던지고 실없는 말과 행동을 한다. 주제도 없다.(사실 주제가 있어도 내가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그런데 끝까지 읽고 있다. 약간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밌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내 머릿속에서 실없는 짓거리를 하지만 상상하는 맛이 있다.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소설 인물들과 존재한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여자친구와 나는 '참존가'라고 부른다)는 소설을 그닥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굉장히 어려운 작품일 수 있다. 첫 시작부터 니체의 실존주의가 나오고, 영원회귀부터 묘사없는 내용 전개와 뚜렷한듯 오묘한 캐릭터들의 선 때문에 상상으로 그려내기도 어렵다. 한편으로 가혹하다. 나는 왜 이 유명한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인가. 남들은 멋지게 이렇다, 저렇다 비평도 하고 나름의 느낀 점도 있는데 정작 나는 알 수 없는 내용일까?
이해한다. 사실 젠체하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떠들고 있는 확률이 높다. 아무리 학식이 높더라도 소설같은 문학작품에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앞서 말했듯 문학도 예술이다. 정답이 없다. 정답을 가진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명확한 주제를 가진 소설은 오히려 비소설에 가깝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응당 그래야한다는 식으로 내용이 흘러간다면 그것은 참 소설이 아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소설과 시를 읽는데 불편과 고통을 느낀다.
다시 보면 문학은 요즘 미술과 같다. 여전히 높은 지식인층에서 소비되며, 즐기는 사람은 당최 크게 늘지 않는다. 어려워하고 즐길 수 없다. 이제는 즐기기 위해 공부까지 한다. 르네상스 유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부터 성경, 그리고 심지어 화가의 내력까지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개뿔 그러면 절대 못 즐긴다. 제대로 즐기는 문화 소비자라면 '와, 잘 그렸네! 색 잘 썼다. 고통스러워 보여.' 정도면 된다. 김환기의 작품을 보면서 '아, 김환기는 이당시 이런 생각을 가져고 이렇게 그렸나봐'라고 마음대로 예상하고 추측해도 된다.
왜 그래도 될까? 문학과 예술은 아까 말했듯 답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답을 정하면 그건 예술이 아니다. 참존가로 돌아와 설명하자면, '프란츠 이거 쓰레기구만', '테레사는 왜 이렇게 답답하지?', '사바나는 뭔 생각이야?' 하면서 어떻게 보면 일차원적일 생각을 마음껏하며 상상과 대입을 해보며 읽는다. 일단 소설을 즐기는 것이다. 소설가가 말하려는 바를 헤아리려 노력하지만 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자체로 읽는다. 일단 다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었는지 모를거다. 3번 읽은 나도 아직 그렇다. 그럼 푹 묵혀뒀다 한 몇 달 뒤 다시 읽는다. 아마 새롭게 읽는 기분일 거다. 그러면 또 혼자 감정이입하고 마음껏 상상하면서 읽어본다. 그럼 느낄 수 있다. 처음 읽을 때와 다른게 보이네? 아, 프란츠가 마냥 이상한 쓰레기는 아닐 수도. 사바나는 이런 생각을 가졌나? 하는 스스로의 느낀 바를 정리할 수 있다.
잘 쓴 소설일수록 답이 없고 복잡하고 고차원적이다. 이걸 이해 못한다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포기하는 건 진짜 바보가 하는 짓이다.
아니 잠깐, 그럼 왜 이런 고통스럽고 무의미해보이는 짓은 왜 하는거야? 난 지금 정답 내리기도 바쁜 세상에 살 고 있다고! 회사에서는 성과 수치를 요구하고 사고하길 원해.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아. 너도 맞고 나도 맞고 우리 모두 다른 생각을 해도 된다는 마인드는 도움도 안된다고! 라고 따질 수 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런 반발은 하루키의 수필 중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생각을 잠깐 밝힌 것에서 대신 답할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는 일본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하루키가 직접 인터뷰와 취재를 하고작성한 르포집이다.
많은 옴진리교의 신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신을 신봉하는 바보들이 아니였다. 도쿄대 물리학 박사생부터 높은 학력의 이공계 출신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옴진리교에서 중간에 도망친 한 사람의 인터뷰에서 그는 소설책 한권(기억이 안난다)을 갖고 들어갔다는 점을 주목할만 하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정답을 내릴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때론 한 개의 정답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복잡성을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여과할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학, 픽션을 소비하지 않는 이공계는 정답을 내릴 수 없는 것들에 반발과 불안을 갖고 있다. 이떄 옴진리교는 명쾌하게 자신의 종교 논리로 해답을 내린다. 이에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을까?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말한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어 소비하면서 진짜 속에 숨겨진 다양함과 입장을 헤아릴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난 앞으로 무의미해보이는 소설을 열심히 읽고 열심히 감성적이고 무질서인 상태를 유지할 거다. 하루키는 수필 속 지하철이 정상 운행되지 않고 멈출 때 묘한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철로에 피크닉을 간다. 우리 모두 질서가 잠깐 흐트러져도, 정답을 바로 내릴 수 없을 때도 나름의 기쁨과 여유,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소설을 열심히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