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아일기

15개월 아기와 부모님과의 유럽여행 2

by ama

"와 대단하다, 아기까지 데리고 어떻게 부모님이랑 여행했어?"

"내 부모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다는 마음이었달까"


이탈리아 어느 골목의 레스토랑. 자리를 안내받자마자 아기 의자를 요청했다. 버둥거리는 아이를 앉히고 벨트를 메자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우리가 뭘 아니, 하고 자연스레 내게 메뉴판을 몰아주는 부모님, 메뉴판 보랴 아이가 칭얼거리기 전에 먹일 레토르트 이유식 챙기랴 마음이 바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치 없이 방광에서 요의를 보냈다. 사진이 없는 메뉴에 관해 부모님께 간단히 설명하고 동시에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며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질 뻔했다. 하, 나 화장실도 가고 싶은데 진짜.


영어를 못하고 유럽 여행이 처음인 부모님은 의사소통 면에서 15개월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구글 맵과 번역기를 깔아드리고 '아직 멀었냐 금지, 돈 아깝다 금지, 물이 제일 맛있다 금지' 등 해외여행 금지 십오계명을 공유하고 왔음에도 어느 순간 나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낯선 지명과 언어 때문인지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해서 “이거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벌써 세 번째예요”라며 퉁명스럽게 말하기도 몇 차례. 남편과 함께 움직이는 일정은 그나마 다행, 나 혼자 어른 둘과 아이 하나를 통솔하는 과정에서 참을 인 자를 새기며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고 되뇌었다. 그리 까다롭지 않은 성향의 부모님과 국내 여행도 자주 다닌 편이었고 휴양지로 가족여행도 떠나봤기에 유럽, 그것도 나는 다녀본 곳을 또 모시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 판단했던 나년을 탓할 수밖에. 젊고 해외여행 경험도 많고 유럽에서 몇 년째 사는 나와 자식들 키우고 먹고 사느라 해외는커녕 변변한 취미도 없이 나이 든 부모님이 같을 수 없다. 내가 천지분간 못하는 아이에게 하나하나 여러 차례 가르쳐주듯 내 부모 역시 그러했을 것이기에 낯선 유럽에 와 아이가 된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자고 몇 번을 다짐했다.


교통편과 숙소 예약을 미리 끝내둔 계획형인 나는 여행 일정을 짤 때부터 부모님과 아이 체력을 고려했다. 나는 한 번 다녀왔던 터라 내 생각에 3일이면 충분할 바르셀로나 여행도 넉넉히 5박 6일로 계획했다. 거의 국내선과 같은 유럽 내 항공편을 타거나 도시를 잇는 기차를 이용할 때는 아이 낮잠 시간에 맞췄다. 15개월 아이는 다행히 이륙할 때 잠이 들어 2시간가량 품에서 자곤 했다. 기차 안 가족칸에서 앉아 창밖을 보기도 하고 테이블에 올라가 춤을 추며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사람을 웃게 했다. 평소 자주 걸어 다녀 캐시워크로 매일 만 보를 채우는 엄마였지만 울퉁불퉁한 길이 많고 사람 많고 낯선 유럽 땅에서 걷는 건 다른 일인지 낮잠을 주무시곤 했다. 파리에서 오전 내내 루브르박물관에 다녀오신 부모님은 두 시간을 코 골며 주무셨다. 잠만 자는 숙소에 큰돈 쓰는 걸 아까워하는 나였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일정 중간중간 쉬어야 하므로 다소 가격대가 있더라도 중심부에 위치한 숙소를 잡았고 이는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유럽여행이 처음인 부모님을 다양한 곳에 모시고 가고 싶었지만 15개월 아이가 모든 일정을 함께하는 건 무리였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를 좋아하실 거라 예상했지만 비엔나에서 할슈타트까지 이동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나는 다녀와봤고 아이가 굳이 함께할 이유도 없었기에 할슈타트 당일치기 패키지를 이용해 부모님만 보내드렸다. 이렇게 프라하 시내 투어, 바르셀로나 가우디 투어, 로마에서 출발하는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나와 아이 없이 부모님만 다녀왔다. 나는 아이와 호텔에서 쉬거나 가까운 공원에서 놀며 여유롭게 지냈다.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내려오는 기차를 놓쳐 아이거글레쳐 역에서 아이와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셨다고 했다. (유심이 EU국 내에서만 되는 거여서 연락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정작 나는 다음 열차 타고 오시겠거니 하고 역내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아이와 빵과 기념품을 사고 놀며 별 걱정이 없었기에 부모님의 걱정이 무색해졌다. 여행 중 나만의 시간도 필요해서 로마에서 반나절은 나도 자유시간을 즐기러 부모님이 아이와 놀고 나 혼자 바티칸 투어를 다녀왔는데, 역시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


프라하 비셰흐라드 성곽에서 프라하 전경이 다 보인다며 좋아하시며 체코 기념품 티셔츠를 입고 커플 사진을 찍던 모습,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다른 건 다 제쳐두고 트리아농 정원의 텃밭 구경 삼매경, 베른 장미공원 벤치에 앉아 잔디밭에서 맘껏 뛰어노는 아이를 바라보던 미소, 그린델발트 숙소에서 아이거 북벽 뷰를 연신 촬영하며 지금까지 묵은 숙소 중 최고의 뷰라고 웃던 장면, 부다페스트 세체니 온천에서 30여 년만에 처음 수영복 입는다던 엄마.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에서 아이를 업고 저만치 앞서 뚜벅뚜벅 걷던 아버지의 등. 여행 중 건져 올린 구체적인 행복의 장면들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주위 사람들 모두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딸이 사는 유럽에 두 달간 여행 온 부모님은 눈은 호강했지만 배는 곯으셨단다. 집에 있을 땐 한식 위주로 식사 챙겨드리고 한 번씩 한식당도 가고 했지만 평균 60년간 드셔온 먹을거리가 맞지 않아 속이 든든하지 않았나 보다. 스위스 기차 안에서 엄마는 바깥 풍경에도 시큰둥해진 듯 "파스타니 피자니 물린다. 상추에 강된장 지져서 볼때기 터지도록 쌈 싸 먹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여행하다 집에 돌아오는 날 회사 때문에 함께하지 못한 사위가 된장찌개에 잡채도 해서 저녁상 차려두고, 사위가 나서서 보쌈도 삶고, 유럽에서 귀한 회도 사서 대접해드린 덕분에 사위 사랑이 더욱 지극해졌다.


몇 천 장의 사진과 몇 백 개의 동영상으로 남은 두 달간의 3대 여행. 그 사진 몇 백 장을 인화해 친정으로 보내드렸더니 앨범을 만들어 한 번씩 펴보신단다. 아이와의 여행에 회의적이었던 나는 오히려 아이와 함께해서 부모님과의 여행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이였던 시절이 있고, 지금 이렇게 엄마가 되었듯 아이를 통해 역지사지를 체험하고 배려와 사랑을 배운다. 내가 내 새끼 책임지고 소중하게 키우듯 부모님도 내게 그랬을 테니. 그리고 비록 아이가 기억하진 못해도 나의 기억 속에, 부모님의 추억 속에 아이는 어엿한 주인공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따금 짜증나긴 했지만 대체로 행복했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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