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꾸라지와 썩은 사과
데이케어에 들어서자 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평소 잘 울지 않는 아이라 의아해하며 노크 후 방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고 있었다.
한쪽 눈두덩이가 발갛게 부어오른 채로.
아이를 달래는 선생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룹의 한 아이가 내 아이에게 장난감을 던졌고, 눈 바로 옆에 맞았다는 것이다.
그룹 내 가장 어리고 작은 아이였고, 그 아이의 보호자는 자리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증거(?)를 삼기 위해 일단 사진을 찍었다. 천만다행으로 눈 바로 옆에 찍힌 자국이 있었다.
눈에 맞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슴을 쓸어내리며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연락했다.
선비 성격의 남편도 뭐 그런 아이가 다 있냐며 화를 냈다.
아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게 그 친구를 혼내달라고 했다. 그러마 하고 답했고 아이는 이내 평정을 찾았다. 평소 엄마가 자신을 혼내듯 그 아이에게도 엄한 얼굴로 불호령을 치길 기대했겠지만 내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에게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이튿날 아침, 기대에 찬 아이를 등 뒤에 두고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붙든 채 (영어로) “다른 친구에게 장난감을 던져선 안 돼!” 하고 말했다.
사건은 3일 후쯤 또다시 일어났다.
아이를 데리러 가니 아이 한쪽 귀에 밴드 비슷한 걸 붙이고 있고, 선생이 어쩔 줄 몰라하며 내게 말했다.
지난번 그 아이가 내 아이의 귀를 깨물었다고.
마이크 타이슨인가? 얜 뭐지?? 정말 화가 났다.
아이들끼리 소동이 있었고 자신이 급히 떼어냈으나 귀를 문 후였다고.
사실 그 아이가 지난주에도 다른 친구를 물어뜯는 사고를 쳤고 요 주의 대상이라고 했다.
아이 부모에게 공갈 젖꼭지를 물려서 보내달라고 말했으나 오늘 가져오지 않았고 마침 이런 사고가 났다고 했다.
조금 울다가 진정됐다던 아이는 엄마인 내가 보이자 쪼르르 와서 또 일러주었다.
선생님은 정말 미안해하며 요즘 자신들도 이 아이 때문에 여러 부모에게 항의를 받고 있고 곤란해했다.
나에게 헤드 매니저에게 메일을 보내 항의하라고도 했다. (여기는 행정 매니저와 보육 교사, 청소 등 잡무 등이 각각 분리돼 있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 치밀어 오르는 화에 못 이겨 아이에게 말했다.
“**야 친구를 아프게 하는 ++이 가까이에 가지 마. 엄마 너무 속상해.“
이번에도 나는 아이 상처를 사진으로 찍어두었고, 참을 수 없어서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영어로)
나는 화가 나면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타입인데, 분노한 나의 타자는 한컴 타자 연습 때만큼 속도를 가했다.
사진도 첨부해서 이러저러한 사건 개요를 정리하고, 선생님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데이케어를 맡기기 불안하다는 요지로 다소 강한 어조로 글을 썼다.
물론 나의 영작 실력이 부족해 번역기의 도움도 받았다.
그 아이로 인해 데이케어에 보낸 후 불안해졌으며 그룹 분위기를 안 좋게 한다는 의미로 ’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 ‘는 말을 하고 싶었다.
비슷한 영어 구문을 찾아보니 ”A rotten apple spoils the whole barrel”이 있었다.
인용하자니 조금 망설여졌다. 어쨌든 남의 자식을 두고 미꾸라지라고 했을 때와 ‘썩은’ 사과라 칭하는 건 느낌이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저 표현을 쓰지 못했고, 다소 공손히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묻는 형식으로 끝맺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고, 며칠 뒤 하원 길에 헤드 매니저가 내게 와서 유감을 표하며 원한다면 가해자(?) 부모와 미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아이는 등원 금지할 것이라 전했다.
사실 나는 그 부모로부터 사과의 뜻을 담은 메모나 작은 반창고, 연고 등을 기대했다. 직접 만나서 못 하더라도 아이 사물함에 넣어두는 방법도 있다.
만일 내 아이가 누구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나는 그러했을 것이기에.
먼저 찾아가 아이와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고 그 점에서 마음이 상했다.
그 아이의 부모는 한쪽이 남미, 한쪽이 유럽 사람이었다. 그들을 만나 따져 물은 들 아이가 다친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미 상한 마음이 되돌려지지도 않을 것이기에 미팅은 사양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9시 이후로 등원하고 가장 먼저 하원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어쩌다 하원 후 놀이터에서 마주쳐도 그 아이 부모는 먼저 와서 알은체를 한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이는 그룹 내 유일한 동양인이었기에 그들이 못 알아봤을 리가 없다)
시간이 흘러 이 사건이 잊힐 때쯤 국제 학교에서 한인 학부모끼리 싸움이 났다는 흥미진진한 소문이 돌았다.
마침 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지인이 있어 전말을 물어보니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 케이스였다.
한 엄마가 ”내가 한국인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행동했을 거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았다. 만일 아이가 한국인이 아닌 아이와 싸웠다면, 부모가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이었어도 어른들끼리 싸움이 났을까.
내가 미꾸라지와 썩은 사과의 간극에서 말을 조심한 것처럼 아무래도 언어와 국적이 다르면 싸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문화 차이로 치부하거나 언어의 한계를 소통 장벽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한국인이든 아니든 간에 자기 자식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내 아이의 아픔은 배가 되고 내 자식의 허물은 덮어주고픈 게 부모 마음일 테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싸우거나 뭐가 됐든 아이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은 그러면 안 된다.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막상 내 아이가 맞고 나니 꼭 복싱이나 격투기를 시켜야겠다고 잠깐 마음먹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람을 때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절대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니까. 그리고 이런 문제 상황을 대처하는 내 모습이 매 순간 아이에게 레퍼런스가 된다는 걸 기억하며 행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