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플 때 엄마는 겸손해지더라
내가 욕아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건 육아에 관한 대부분의 서사가 이러저러 해서 힘들지만 내 아이는 사랑스러워,로 끝나는 게 싫어서다. 아이의 귀여움이 뜬금없이 나타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엄마도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아기를 물고 빨고 귀여워하는 엄마도 있는가 하면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엄마인 여성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간 내가 아이와의 분리, 거리감이 가능한 건 아이가 건강하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감사하게도 임신 기간에 큰 이벤트가 없었고, 아이도 뱃속에서 무탈히 지내다 세상에 나와주었다. 그리고 18개월인 지금까지 기본 접종을 제외하고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해외생활이 썩 마음에 들고 잘 지내는 편이지만 아이와 함께 이곳에 살면서 가장 피하고 싶고 우려되는 점이 바로 병원, 의료 시스템이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한데, 다행히 아이는 지금까지는 그렇게까지 아픈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따듯한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곳이 확 추워서 그랬을까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나더라도 아이는 잘 노는 편이었고 한국에서 가져온 시럽 해열제가 잘 들었다. 그래서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열이 나니 데려가라는 연락을 줄 때도 박탈된 나의 자유시간만 아쉬웠을 뿐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해열제를 먹이고 낮잠 시간이 되어 재우고 났음에도 좀처럼 열이 떨어지지 않고 아이는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고 칭얼거렸다. 평소와 달리 밥은 잘 먹지 않지만 틈틈이 물은 잘 먹고 과일은 잘 받아먹기에 탈수가 걱정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체온계가 38, 39도를 넘어가며 뿜어내는 붉은 빛에 덩달아 내 마음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엄마의 지랄맞은 성격을 아는건지 아이가 독립적인 성향이라 내게 매달리고 치대는 편이 아닌데 열이 나고 아프니 평소답지 않았다. 처음으로 해열제가 듣지 않았고,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내게 달라붙은 뜨거운 아이를 안고 있자니 난감했다. 응급실에 가봤자 아이를 벗겨놓고 닦인 채 열을 떨어뜨리는 것밖에 하지 않는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긴 한국이 아닌 유럽이었고, 나의 경험상 응급실에서 다른 병을 옮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차로 한 시간 떨어져 출근한 남편에게 연락해 오라고 해봤자 별 도움도 안 될 것이고, 일단 아이를 들쳐 안고 약국으로 향했다. 아이가 열이 있는데 집에 있는 해열제가 듣지 않는다고 하자 약사는 홈닥터가 없냐고 난색을 표했다. 열이 너무 높고 지속시간도 꽤 되었다며 열의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나는 감기인 것 같다고 일단 집에 있는 타이레놀과 다른 계열의 약을 달라고 요청했다. 좌약과 이부로펜 계열 약을 쥐여주며 교차복용에 관해 설명하는 약사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뒤로한 채 집에 와 처음으로 좌약을 주입했다. 밤새 벗겨놓고 닦이고 열이 좀 떨어지면 다시 옷을 입히고 생각날 때마다 열을 재는 열 보초를 섰다. 말 못하고 끙끙거리는 아이 옆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대신 열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타인을 대신해 아파주고 싶은 이런 이타적인 면이 있다니. 키우던 개가 아플 때도 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이렇게 가슴이 녹아내릴 것처럼 속이 타진 않았던 것 같다.
아이는 이틀을 앓고 열이 내렸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여태껏 보이지 않은 형태의 열이니 돌치레인가 싶기도 했다. 아픈 아이에게 나는 좀더 다정하고 뭐든 다 해주는 엄마가 되려 했다. 열이 식고 나의 모성애도 다시 이성을 찾았다. 지금껏 나의 주관대로 육아를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건강하기 때문이라는 결론과 함께. 그리고 평범한 일상과 거기서 오는 평온에 감사를 더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