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춘문Ye

불사신이 쓰는 유서

by Ye


죽음에 관해 가장 많이 생각한 일주일이었다. 이번 주 작문 스터디의 제시어가 ‘죽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껏 나의 죽음을 제대로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 죽음을 피부로 느낀 건 스무 살 때였다. 성인이 되고 얼마 안 됐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살갑지는 않았지만 내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책부터 펴던, 죽음도 이겨낼 것처럼 강인하고 대쪽같은 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별을 겪고 더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다. 학생회, 동아리, 계절학기, 대외활동 등 대학생활에서 꼭 겪어봐야 하는 목록을 뽑아서 하나하나 완수했다. 죽음은 내 안에 큰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다. 내게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바쁘게 움직이는 원동력이 됐다. 한번 결심하면 미친 듯이 달려들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겐 그리 많은 시간이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됐던 말은 책에서 읽은 에피쿠로스의 말이었다. 나는 없었다. 나는 있어왔다. 나는 없다. 나는 마음 쓰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미래를 걱정하지만, 과거를 걱정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모든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왜 존재하지 않을 시간을 걱정하는지 물었다. 죽음 이후 시간을 탄생 이전 시간과 똑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에 빠지면 저 끝까지 파고드는 내 머릿속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그러면서도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덜어주는 말이었다.


소설가 곽유진은 자신이 키웠던 햄스터 두 마리에게 자신은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을 거라고 했다. 겨우 이삼 년을 사는 존재들에게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은 불사신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시간은 상대적이라 내게는 잠시가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될 수도 있다. 10년째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에게 나는 어떤 불사신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작고 약하지만 강한 사랑을 주는 존재한테서 나의 목숨도 기꺼이 나눠주고 싶은 사랑을 배웠다. 삶의 길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의 삶에 큰 의미를 남길 수 있다. 내가 꾸준히 글을 쓰는 이유도 나처럼 작은 존재가 이 세상에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의미를 오래도록 남길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죽음의 순간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언젠가 읽은 문학수상집의 평론 글에 ‘죽음이란 살아남을 자들과의 이별이기 이전에 나 자신과의 이별’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나의 몸으로 세상을 겪었으니 죽음의 순간도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마음으로 느낄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나 자신에게 가장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 자신이 단단해졌을 때 비로소 주변을 챙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고 밤늦게까지 수업을 듣는 현재의 삶을 즐기려고 한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파졸리니는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죽는 날까지 내가 이 세상의 역사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인식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불사신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살고 싶다. 유한한 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그 시간 동안 삶의 의미를 사람들과 최대한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소멸의 순간까지 나 자신에게 가장 떳떳한 사람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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