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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Apr 29. 2020

예술가는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쓰다

이번에 읽은 '달과 6펜스'에서는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생활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는 양립할 수 있을까?',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술가는 도덕과 관습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였다. 나는 신문이나 다른 매체에서 나온 예술가들의 도덕적 타락과 죄에 대한 변명으로 그저 자신의 예술의 일부라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많이 봤었고, 그래서 항상 모든 예술은 일반적인 사회의 시스템과 영원히 평행선을 달려야만 하는 운명인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예술의 이름 아래 자행되는 강력 범죄와 표현의 자유 아래서 행해지는 또 다른 예술가들을 향한 인권침해는 과연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에 사는 처자식이 딸린 가장이자, 어엿한 직장도 있는 사회인이다. '선량하고 따분한'이라는 표현이 그를 설명하는 유일한 단어일 정도로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이었던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 그를 향한 수많은 소문들이 주위에 떠돌고 있었지만, 화자는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 본심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서 그는 가난하지만 예술가로 살아가는 스트릭랜드를 발견하게 된다. 허름하고 낡은 호텔방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그는 병에 걸려있었고, 찰스의 재능을 알아본 또 다른 화가 더크 스트로브와 그의 아내 블란치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화자가 본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고, 자신의 몸도 전혀 돌보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나중에 더크의 아내와 함께 불륜을 저지른 후에 그녀를 떠났고, 이는 블란치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사실 앞서 말한 '예술가로서의 스트릭랜드'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런던에서 그는 좋은 남편과 아빠, 그리고 직장 동료였다. 과묵하고 조용한 그는 그저 사회 속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한 개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떠나온 파리에서의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기존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 윤리, 보편적인 법칙은 그에게 있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를 찾아간 화자가 말하는 상식, 도덕, 윤리에 기반한 말들은 오히려 우습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런던의 가족들을 떠나고, 블란치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의 예술과 인생은 마침내 타히티 섬에서 끝을 맞이한다.



원주민 아타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가진 그는 나중에 나병으로 고생하다 생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스트릭랜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자기가 살던 집 벽에 거대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은 모두 불살라버리라는 유언에 의해 그의 아내와 화자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세상에서 소멸된다. 나병에 걸린 그를 치료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 닥터 만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남긴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매개체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림에 대한 강렬한 충동으로 런던을 떠나 타히티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후대에 남겨질까? 소설 '달과 6펜스'는 실제 존재했던 화가 폴 고갱의 인생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역시 서른다섯에 직장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위대한 예술가로 역사책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소설 속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자신의 처자식을 버리고, 여자관계가 복잡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미성년자와도 동거를 했다는 기록까지 있으니 오히려 소설보다 더 막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예술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죽기 직전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예술을 끝낼 수 있었고, 폴 고갱은 모두가 알다시피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로서 역사에 남았다. 하지만 그들의 성취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막장 중의 막장인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과 예술에는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교집합이 거의 없었다. 스트릭랜드의 모든 작품들은 극도의 탐미성을 띠었고, 이런 그림 성향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서까지 그림을 그려야만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소설의 영역에서만 보면 찰스 스트릭랜드는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난 그의 인생은 불꽃같다. 비록 여러 문제들이 있었지만 작가는 찰스를 자신만의 논리로 무장한 강렬한 악한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비록 남들과는 다른 기행적인 삶에 대한 일종의 신화 만들기의 부산물이었지만 말이다. 그 시선은 소설에서 등장하는 희생자들이 미학적인 관점에서 그들이 왜 버려질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데 일조했다. 물론 이런 일이 소설 안에서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분야의 저명한 대학교수, 평론가, 그리고 시인들은 수많은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되었고, 몇몇은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살지만, 정작 그들의 물리적인 육체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의 관습과 도덕은 무시하는 듯 보인다. 물론 작품에 대한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으로 억울한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문학과 시와 소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우르는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행동은 정당한가. 나는 내가 존경했던 한 시인이 그런 행동을 한 예술계 인사 리스트에 오른 것을 보고 슬펐다. 그가 쓴 시는 나로 하여금 반성을 하게 하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밤을 보낼 때,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슬퍼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제 우리는 기존의 가정을 다시 재고해봐야 한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보내는 어느 밤이, 다른 이들의 피눈물을 쏟는 새벽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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