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벌린 라우의 '가출, 어느 거리 소녀의 일기'를 읽고 쓰다
참담할 정도로 충격적인, 그러나 외면하기엔 너무 잘 쓴 소설을 읽었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담긴 글이라 더욱 그랬다. 이 책에서는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매춘과 마약을 하면서 보낸 주인공의 2년이 보기만 해도 우울해질 정도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 소설을 리뷰한 외국의 여러 사이트에 가보면 꽤 적지 않은 독자들이 그녀의 글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너무 우울해진다며 낮은 별점을 준 것을 볼 수 있다. 캐나다의 중국계 이민자인 그녀는 부모님과 갈등을 겪다 집을 나오는데, 본문에서는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던 그 시절을 자신의 가출 생활보다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와 독립을 찾아 나선 거리 역시 지옥과 마찬가지였다.
방황하는 그녀가 종국에는 완전한 파멸을 겪으리란 법은 적어도 캐나다엔 없었다. 책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비록 사랑을 거두고 자신을 방치하긴 했지만, 주인공에겐 처음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준 사람으로 남아있는 아버지는 그녀가 극심한 애정 결핍을 느끼는데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기관의 정신 상담가들이 아무리 주인공을 위해서 조언을 해주더라도 그녀는 그들에게서 진심을 느끼지 못하고 도움을 무시한다. 그나마 상담가 하이타워 선생님을 따르긴 하지만, 그에게도 일종의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내비친다. 그에게서 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나 언제든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 심리에서 그런 양면성을 내비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를 망가트리기 시작한다. 그 시간 동안 매춘과 마약은 주인공의 육체와 정신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주인공은 래리와 스펜서라는 인물을 만난다. 거리에서 만난 역겨운 인간들 중에서 그 둘은 그나마 에벌린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으나, 래리는 그녀에게 마약을 처음으로 알려줌으로써 중독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었고 스펜서는 온전히 마음을 에벌린에게 주지 않아 그녀가 더욱 불안증에 시달리도록 만든 사람이었다. 에벌린은 가출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정신 상담을 받는 동시에 삐뚤어진 성실로 가득 찬 자기 파괴 행위를 계속한다. 길에서 매춘을 하고 돈을 버는 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싫어하고 치욕적인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녀는 그 일이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자신감을 채우는 일이라고 자기를 기만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너무 안타까움을 느꼈다. 선심이 아닌 진심으로 나를 도우는 사람들이 있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어느샌가 멈출 수 없는 곳까지 스스로를 밀어 넣는 나 자신이 너무 싫은 경험을 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에벌린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곧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였기에, 꿈을 가지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물론 글쓰기 자체가 그녀에게 구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계기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점차적으로 그녀의 의식을 바꿔나갔던 것이었다. 그래도 문학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은 일기의 형식으로 그녀의 2년간의 길거리 생활을 담고 있는데, 소설을 읽는 내내 그녀가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성공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쓴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는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TV에서 그녀가 자신을 변호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살겠다는데 누가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소설 속 에벌린은 너무 어렸었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격앙돼있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야기 내내 긴장감이 곳곳에 서려있었고, 자신이 행동을 저질러놓고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그녀의 탓을 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자신은 자기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 만큼, '자신이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행의 가속도는 스스로를 더욱 몰아붙여 어느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이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산산조각 난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거나, 그저 자신의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쓸데없는 자존심의 표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해지지만 행복을 찾는 과정은 모두 비슷하게 흘러가는 법이기에, 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결국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에벌린은 단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던 것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