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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Jun 03. 2020

마스크를 안 쓰면 위험하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영화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쓰다.

지브리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은 그리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지브리의 장편 애니메이션들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해도, 인간과 기술, 그리고 자연의 관계를 조명하는 애니메이션은 결국 지브리에서 두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는 앞서 썼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소개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다. 두 영화의 개봉 시기는 각각 다르다. 일본 기준으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984년에 개봉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고, 이후 1997년에는 '모노노케 히메'가 극장에 상영되기 시작했다. 두 영화는 모두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오늘날까지도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부해 속에 있는 유독한 포자. 나무를 썩게 하고 공기 중에 독성을 퍼뜨리는 주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 작품들을 비교하곤 한다.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의 세계관이 좀 다르긴 해도, 결국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과학이 발달한 미래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인간 문명이 파괴되고,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부해'라는 숲과 유독한 포자로 인해 인류가 점점 쇠퇴해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유일하게 부해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은 바람계곡에 사는 공주다. 그곳에 있는 마을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지만, 어느 날 불시착한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으로 인해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비행선을 추적한 왕국의 군대가 그 계곡으로 들어오게 되자, 나우시카는 전쟁에 휘말린 자신의 마을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동분서주하게 된다.


어떤 총탄으로도 뚫을 수 없었던 오무는 과거 거신병과 함께 과학 문명 파괴의 주역이었다.


애초에 모든 문제의 발단은 토르메키아 왕국의 군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모든 부해와 포자, 오무를 몰살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고대의 거신병을 되살리는 기술을 개발해 강력한 오무 떼와 부해를 모두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나우시카의 노력으로 겨우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게 된다. 반면 나우시카는 인간이 오무와 부해를 없애려 하지 않고 같이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영화 중반에 그녀는 부해 아래에 있는 어느 공간에서 부해의 독성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스스로도 부해의 식물을 바람계곡의 비밀 아지트에서 기르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영화는 자연과의 공존이 인류에게 더욱 효과적인 생존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견지명...


하지만 아쉬운 점도 존재했었다. 그것은 바로 나우시카가 너무 먼치킨 급의 사기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입장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 자연의 진실을 알리고 공존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생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너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모노노케 히메'와 비교된다. 그 영화에는 나우시카처럼 완벽한 이상향의 인물이자 모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인간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을의 사람들로부터 자연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원령공주 '산'은 자연 속에서 늑대들과 함께 자라난 사람이지만, 자연 속 모든 구성원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멧돼지 무리와 그들의 수장인 옷코토누시가 바로 그 증거다. 영화 속에서 자연은 '나우시카'의 자연과는 달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언제든지 배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인간 역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돌아오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라는 결과물 때문에 그들을 무조건 절대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는 나우시카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자연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jpg


그래서 나는 두 영화의 결말 중에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냐고 한다면 '모노노케 히메'의 결말이 더 좋았다고 말할 것이다. 주인공의 희생이 가져오는 극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는 식의 문제 해결 방식이 더 현실성 있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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