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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Oct 17. 2020

독서 강박증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나서 생긴 일들

이젠 브런치에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눈팅하고 나름대로 여기서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나는 사실 블로그에서 먼저 글쓰기를 시작했다. 독서라고 해봤자 우리나라 소설집과 물 건너 온 소설들만 찔끔 건드리고 비문학은 전혀 읽지 않았던 시절, 내 머릿 속에서는 왠지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3일 동안 열심히 책을 읽고 나서 나중에 다 까먹는다면 그동안의 내 노력들은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모든 시간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 같아 왠지 아쉬웠다. 한 줄만이라도 남기자, 그것도 귀찮아진다면 다른 사람들이 쓴 독서록이라도 공유하자는 생각은 그렇게 블로그와 브런치의 형태로 남았다. 거기다 쓴 독서록들을 지금 읽어보면, 뭐든 쉽게 질리는 내 성격에 이 정도까지 온 것도 솔직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엔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 주는 것이 좋았다. 글을 잘 쓰면 그만큼 조회수가 올라가고, 누가 가끔씩 좋아요도 눌러주면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대학 교수도 아니고, 멋있는 커리어를 쌓은 직장인이나 전문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대단한 경험을 쌓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고마웠다. 특히 넷플릭스의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을 리뷰한 글들이 네이버 검색창 상단에 올라온 것을 봤을 때는 정말 기뻤다. 그만큼 내가 쓴 것들을 사람들이 많이 읽었고 댓글도 달았으니 성취감은 배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블로그에 글을 써나가면 할 수록,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한 의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애초에 좋아서 시작한 일에 의무감이 생기는 순간은 남한테 돈을 받을 때인 것 같다. 방학 때 할 일이 없어서 시작한 웹소설 공모전이 잘되서 계약으로 이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아무리 즐거운 취미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일로 바뀌는 순간 부담감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매일매일 글을 쓰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과 관련이 있다. 어차피 대학생이고 다른 분들처럼 뚜렷한 직업이나 특별한 커리어를 쌓은 경험도 없으니 소소한 경험을 담은 글이라도 쓰자, 라는 다짐은 나의 게으름과 끊임없는 합리화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게다가 독서에 재미를 붙이기도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읽고자 하는 이 책이 과연 나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라는 기대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가졌던 실망이 계속 반복되면서 나타난 체념이 독서에 대한 즐거움을 앗아간 원인이었다. 내가 읽었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한테 소개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글을 쓰도록 하는 열정의 근원이었지만, 이젠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만나기가 힘들뿐 더러 감정이입도 힘들어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되었다. 다만 아직도 나는 언젠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즐거웠던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길, 그리고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줄 책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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