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희 Dec 25. 2020

우울과 더불어 사는 방법

다양한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법칙들에 대해서

  이번 학기를 마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단어의 뜻을 고르고, 틀린 영어 문장의 문법을 고치고, 그리고 짧은 요약문과 에세이를 써야하는 3시간짜리 영어 시험이 마지막으로 치룬 시험이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부담스러울 것이라며 넉넉하게 3시간에서 30분을 추가 시간이라고 더 주셨는데 그것이 오히려 내게 독이 되었는지, 느지막이 요약문과 에세이를 쓰다가 20분 여를 남겨두고 겨우 답안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금요일 하루에 아무 때나 들어가서 보는 교양 영어 시험은, 그렇게 금요일이 시작하는 밤 12시부터 새벽 3시 사이에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왕이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랬는데 이번에 맞은 매는 상당히 강력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그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학교 커뮤니티에는 이번 시험이 진이 다 빠지는 시험이었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그 글들을 대강 읽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사실 그리 열심히 살았던 3개월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수업이 온라인 강의로 진행됐기에 나는 항상 늘어져있었다. 가끔씩 9시에 일어나기 버거우면 수업 녹화만 해두고 다시 잠을 잤던 적도 많았다. 이번 학기에는 아침 교양 수업이 두 개 정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정신으로 들었던 것들이 거의 없었다. 열정적인 교수님의 목소리는 그렇게 불충하고 게으른 제자의 꿈결 속으로 녹아들어 흐물해졌고, 흐릿해진 기억들은 그만큼 답안지의 하얀 빈칸들로 치환되었다.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에서 실존주의에 대해...', 나중에 시험 준비를 위해 녹화본을 다시 재생했을 때 교수님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으로 인한 어색함, 그리고 적막함과 싸우고 계셨다. 지난 학기에도 뵈었던 교수님의 온라인 제자로써 다시 한번 죄송스러운 순간이었다. 언젠가 학기 중간에 나는 한두 번 정도 학교에 나가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똑같이 감당해야 했던 무응답의 어색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결국 집에서 듣는 수업은 캠을 켜고 듣는 것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수업을 반수면 상태에 빠진 채로 참여했다.



  생각해보면 이번 학기만큼 잠이 많았던 적도 없던 것 같다. 종강 몇 주 전부터 코로나가 심해져서 헬스장도 문을 닫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카페도 테이블을 치웠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도 거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집에서 밍기적거리기만 했던 내가 그나마 밖을 나가는 이유는 카페 독서, 헬스장, 그리고 산책이 전부였는데도 코로나는 나에게 일절의 야외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독서는 집에서 할 수 있다고 해도, 운동은 헬스장의 운동 기구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운동들이 있었기에 몸 속 근육들이 점점 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로도 그다지 느낄 수 없는 편이라고 남에게 자부할 수 있었지만, 시작 후에는 운동을 하루라도 안 하면 좀이 쑤시고 괜히 체력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푸시업이나 맨몸 스쿼트라도 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운동량이 부족해지고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나약해지기 마련이었다. 언젠가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주는 할아버지의 대사가 기억난다. '네가 뭘 하든 거기엔 체력이 뒷받침되야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지금까지 나는 거의 점심까지 잠을 자고 있다. 불 같은 마지막 2주를 보내고 나서 오는 일종의 번아웃과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한 것 같다. 늘어지는 몸과 머리의 빈자리를 부정적인 감정이 대신해서 점차 내 구석구석을 잠식해나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면, 나는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한다. 샤워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전날 싱크대에 쌓아둔 설거지거리를 뽀득거리며 하나씩 정리한다.



  물론 휴식을 가지지 말자는 주의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의 온도를 잘 조절하자는 말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바쁘게 살아도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나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이 한 번쯤은 있기 마련이고 휴식을 가지는 시간에는 그것의 발생 빈도가 더 잦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우울의 파도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스릴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할 일을 만들어 부산하게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래서 요즘처럼 친구를 만나기도 힘들거나 여행을 갈 수도 없는 날이면 나는 괜히 책장 정리를 하거나 방 안의 가구 위치를 바꾸는데, 그러다 가끔 걸레질에 발동이 걸리는 순간이 오면 그날은 하루 종일 청소를 한다. 하얗던 청소용 타월에 어느새 까맣게 먼지가 끼면 피어오르는 묘한 희열 같은 것이나, 환기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상쾌하고 깨끗한 느낌의 서늘함은 덤이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어느 정도 공존을 위한 선을 설정하고 그것이 넘어오지 않도록 조절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인생의 숙제라고 생각했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적절한 감정의 온탕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나는 아직 이런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감정적으로 성숙한 인간은 어느 정도의 무뎌짐을 견디고, 또 제어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 강박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