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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Jul 22. 2020

다 커버린 상추와 깻잎을 뜯으며

어느 주말 농장의 추억

아버지는 우리 형제가 어엿한 사회인 구실을 할 즈음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어느 산자락으로 들어가겠다고 언제나 말씀하셨다. 누구든 사회에 찌들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법인데다가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이 이런저런 요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 안한 사람이 없겠냐마는,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다짐들을 어머니나 우리 형제들에게 세뇌시키곤 하셨다. 시골에서 태어나셔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 곳에서 살았던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보면 이해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골에 살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 묘한 감동까지 생겨나곤 했다.


"그럼 엄마는 어떡해?" 내가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시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리한 수박이며 메뚜기 튀김보다는 햄버거에 익숙한 10대를 보내신 분이셨다. 공부를 잘하셨던 당신께서는 의정부에서 가장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만 다닌다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셨고, 어머니도 그즈음에 우리 아버지를 만나셨다.


엄마, 그러면 나중에 아부지 시골 내려가면 같이 갈꺼야?

아니? 나는 여기서 살건데?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셨지만 은근한 기대가 담긴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벌레가 너무 싫었던 도시 애송이였고, 내 동생은 곤충학을 전공하고 있는 흙과 벌레에 익숙한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느이 동생이 졸업하면 아빠랑 같이 내려가서 살라고 해라. 나는 너 다 키우고 나면 친구들이랑 놀러 다닐꺼야,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중에 회사를 다니면 나에게 두둑한 용돈을 기대하겠다는 눈빛과 함께.


어쨋든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로 주말 농장을 시작하셨다. 작년부터 동네 근처 주말 농장 전용 밭을 가꾸시던 분에게 두 고랑을 빌린 후에 시작한 농사는, 각종 상추며 고추, 가지와 깻잎을 시작으로 고구마와 감자로 이어졌다. 그리고 올해는 쌈채소라는 주제로 모든 종류의 상추, 그러니까 적상추와 외국 상추, 그리고 케일이나 다른 이름 모를 채소들로 우리 집의 두 고랑을 가득히 채웠다.


나는 상추가 그렇게 빨리 자랄 줄 몰랐다. 이거 하나 심어서 격주마다 하나씩 뽑아 가겠네, 라며 툴툴 대던 나는 어느새 이틀에 한 번씩 자라는 상추를 뽑으러 나가는 우리 집의 충실한 일꾼으로 변했다. 올해도 채소들을 심으러 갈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반항했던 나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지독한 권태에 굴복하고 말았다. 욕나오게 습하고 더웠던 지난 몇 달 간, 나는 지글거리는 밭에서 혼자 상추를 뜯고 잡초를 뽑았다. 고추는 맨 윗 부분을 잡고 위로 뜯어야 하고, 상추는 맨 아랫 부분을 잡고 조심해서 아래로 뜯어야 한다. 그리고 깻잎은 네 손바닥만한 것은 다 따서 가져와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이틀 전에 뜯어온 결과물들을 물로 씻으셨다. 무시무시한 양이었다.


물론 주말 농장을 다니며 상추 뜯는 법만 배운 것은 아니었다.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고랑을 가득 메운 채소들을 모두 수확하다보면 머릿 속을 어지럽히던 각종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몸이 바쁘면 쓸데없는 생각은 안난다, 같이 일을 하던 옆 고랑 어르신이 음료수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확실히 일을 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흔히 하는 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들은 상추를 뽑으며 나는 땀방울과 함께 흙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20년 넘게 회사일을 하시며 분명히 아버지는 온갖 걱정이며 고민을 하고, 사회의 더러운 꼴들을 다 봤을 것이다. 그런 모습들을 잊기 위해서라도 당신께서는 시골로 들어가고자 하신걸까. 나는 다 커버린 상추와 깻잎을 뜯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상상해봤다. 흐르고 있는 땀을 닦으며 저 멀리 자라고 있는 채소들과 작물들을 바라보는 당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행복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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