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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Jul 16. 2020

가장 보통의 인간으로

브런치를 시작하며 느낀 점

올해도 벌써 반 이상이 지나갔다. 비록 코로나 사태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올해 초에 사회복무요원으로 대체복무를 마무리지었고,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으며, 브런치에서 글쓰기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년 간의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바꿔보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는 싫든 좋든 이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버 블로그에 비해 글쓰기 에디터가 조금 빈약한 면이 없지 않지만, 키워드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브런치가 좋았다. 의사, 교수, 회사원, 화가, 마케팅 전문가 같이 다양한 직업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생 선배들이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공간은 다른 어느 글쓰기 사이트보다 매력적인 곳이었다.


나는 브런치에서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독후감을 써서 올리기로 했고, 다행히 브런치 운영자분들은 내 글을 좋게 봐주셨다. 몇 개월 전, 네이버 메일로 받은 '브런치 합격증'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봐도 빈약한 글들을 보고 인정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더 좋았던 것 같다. 사실 그 시기에 나는 글 쓰는 취미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학창 시절 내내 수능 국어만 공부했던 내가 해본 글쓰기라고는 대학교 논술 시험 준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 글을 읽어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하나의 문제와 하나의 정답 찾기, 당시에 썼던 글은 모두 다 그런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가 치밀한 글도 아니었다. 엉성하지만 그래도 억지로 쓴 글, 출처 불분명, 아니면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표현의 남발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내 글쓰기의 문제점이었다.



물론 위와 같은 문제들은 모두 작문 스킬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래서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의 성장을 도모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교수님이 조언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절망했던 점은 나만의 스토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브런치를 보면 다양한 커리어를 가지고 계신 분들의 글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의사가 들려주는 병원 이야기'나,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아빠이자 대학원생의 일대기' 같은 주제로 쓴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괜히 움츠려 든다. 나는 아직 대학생이고, 힘든 일이 뭐였냐고 물어보면 기껏해야 대체 복무하면서 재수한 일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업 상의 커리어를 많이 쌓으신 분이 아니더라도 인생 경험에 있어서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삶의 애환이며 결혼의 문제점들을 주제로 그분들 앞에서 뭘 안답시고 글을 쓰겠는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며 쓰는 것은 마지막에 가서 다 티가 나기 때문에 쓸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김훈 작가의 '연필로 쓰기'라는 에세이에서 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평생 고된 시집살이만 해서 제대로 글을 깨치지 못하셨던 할머니들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읽고 쓸 수 있게 되셨다. 할머니들은 뒤늦게나마 배운 한글로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어려서부터 지금의 시댁으로 시집와서 밥 짓고, 자식들 키우시다 전쟁 때문에 피난 가고, 거기서 또다시 고생하시고... 몇십 년 간의 애환을 그대로 옮긴 할머니들의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였다. 책에 수록된 할머니들의 시는 모든 인생의 애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지어진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글쓰기가 정직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휘황찬란한 수사로 평론이며 소설을 내놓을 수 있을지 언정, 할머니들의 인생을 풀어놓은 짧은 시 한 줄이 주는 감동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유명한 문학작품에서 오는 감동과는 또 다른 울림을 줬다. 학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이나 문학, 혹은 내 전공이든 간에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공부해오신 분들의 글을 보면, 확실히 내 것에 비해 논리적이고 차분하며 마무리가 깔끔하다. 그에 비해 나는 항상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결국엔 빈약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는 내공의 부족, 사유의 부재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더 겸손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경험해도 세상엔 나보다 더 깊고 넓게 배우고, 남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온갖 경험을 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글을 쓰고 읽으면서 알았기 때문이다. 오만과 편견, 지적 허영은 좀 더 많은 경험과 배움, 좌절을 통해 깨끗하게 사라진다는 것, 나이만 먹는다고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덤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가장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 가장 보통의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비록 인간의 몸뚱이로 마주하는 세상은 한없이 넓고 배움의 길은 끝이 없지만, 그렇기에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더 많다고 다짐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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