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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풍경 (두 번째 풍경)

36년 세월을 함께 한 선풍기

by 광주 이혜숙

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거실에는 에어컨이 돌아간다. 하지만 방에는 아직도 선풍기가 자리하고 있다.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새 제품들이 있지만 남편의 방에는 36년 동안 여름이면 어김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한 대가 있다. 이 선풍기는 그 당시 신기하게 느껴졌던 оо전자의 ‘뉴로퍼지(인공지능)’와 ‘카오스바람(자연 상태의 바람)’기능을 갖추고 있는 최고급 기기였다. 바람의 방향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해 놀라웠다. 12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값이었지만, 그 혁신적인 기능을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이 선풍기는 여섯 번의 이사를 함께하며 여름이면 빠짐없이 더위를 식혀주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조용히 창고로 들어가 다음 여름을 기다렸다. 긴 세월 속에서 목이 부러지고 앞덮개가 종종 떨어지기도 했지만, 남편은 철사와 검정테이프로 정성스럽게 보수해 가며 끝까지 사용했다. 켜고 끌 때마다 손으로 조작해야 하는 불편이 있음에도, 내 교체 제안에 펄쩍 뛰며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요즘 선풍기보다 더 잘 돌아가고 시원해. 나는 이게 좋아.”

그 말은 때때로 옛 물건에 대한 애착을 넘은 고집처럼 느껴져

‘새것이 얼마나 좋은데, 왜 저럴까’

투덜거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폭염주의보가 내려 몸이 지칠 만큼 더웠던 오후. 나는 그 오래된 선풍기 앞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놀랍게도 새 제품보다 더 시원했고 소음도 거의 없었다. 그 순간 문득, 에어컨도 없던 시절 우리 가족이 이것 하나로 여름을 견디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무더운 날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 선풍기도 우리 가족과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우리들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간절한 기도와 찬송이 방 안에 가득했고, 학교에서 상처받고 돌아온 아들은 울먹이며 억울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딸들은 학원과 유치원에서 있었던 하루를 재잘거리며 분위기를 밝게 해 주었다. 단 한 대뿐이던 그 선풍기는 방을 옮겨가며 우리 가족의 여름을 책임지던 든든한 존재였다.

그때 세 살 배기였던 막내딸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이 느껴졌다. 선풍기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이 선풍기는 고물이 아니라 우리 집 보물이네요.”

순간, 새것이 최고라고 믿었던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너도 우리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나 많은데…. 기쁜 일, 슬픈 일을 다 지켜보며 말없이 함께해 줬지. 너를 버리려 했던 내가 미안하구나. 우리 가족과 끝까지 함께하자.’

소중한 물건은 새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추억이 아닐까.

우리 가족과 함께해 왔던 이 선풍기는 앞으로도 쉽게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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