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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의 작은 즐거움>

안개 속에서 찾은 이정표

by 광주 이혜숙

안개 속에서 찾은 이정표


청소년 상담사를 은퇴한 후 시골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남편과 이른 아침에 들판을 걸었다. 담양 수북에서 영산강 쪽으로 3시간을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볼 수 없었다. 집이 있는 삼인산 방향으로 걸었지만 길이 낯설고 집이 보이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몸은 지치고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찌해야 하나 난감하던 때에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이정표가 보였다. 반갑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상담을 하면서 만났던 한 청년이 생각난다. 첫 대면에서 K는 군대를 제대한 지 6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잘 생기고 훤칠한 키에 육중한 체구였다. 군복무 할 때보다 몸무게가 30kg 늘었다고 했다. 머리는 귀 밑까지 길어 있었고 세수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전문기술 대학교에 한 학기를 다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서 휴학을 한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노상에서 구두 닦는 일을 하며 한 푼 두 푼 절약하여 허름한 주택을 구입했다. 아버지는 폐암 수술 후 회복 중에 있었고, 어머니는 조울증으로 자주 입원을 했으며 폐지를 모아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형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데다 결핵을 앓고 있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집 안 여기저기에는 검은 비닐봉지와 옷가지들이 굴러다녔고, 형광등이 고장이 나서 어두컴컴하였다. 담배를 많이 피워 천장이 누렇게 변해 있었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청소를 했다.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하여 그 가정의 어려움을 알렸더니 사회복지사가 구청에 연계하여 집수리(보일러, 도배, 창문교체)를 도와주었다. 그의 형은 시설로 입소하도록 도왔다.

K는 무기력과 우울증,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밖에 전혀 나가지 않고 온종일 방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었다. K가 휴학했던 학교에 연락했지만 휴학 기간이 길어서 복학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관심 있는 유통 분야의 공부를 하도록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여 주었다.

K의 사회적응을 위해 부모님과 의논하여 휴대폰을 구입해 연락을 끊고 지냈던 친구들과 소통을 하도록 했다. 고용지원센터에 방문해 취업정보를 찾도록 안내하고 운전을 배우게 했다. 자전거를 사 주었지만 일 년 동안 몇 번 타지 않아 녹이 슬어 있었다. 한편 그의 비만관리를 위해 “국민건강 증진센터”에서 3개월 동안 새벽마다 함께 운동을 했다.

건축 일을 하시는 분과 집을 방문하여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도록 여러 차례 설득하였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부모님께 내복과 고기도 사다 드리라고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가르쳤다. 하지만 3개월 후에는 동료관계의 어려움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에 제과점을 운영하는 분에게 부탁드려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 직장생활이 힘들면 스트레스 안 받는 안전지대인 자신의 방으로 숨어버리곤 하였다.

그는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상담을 하면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대인관계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K는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 물류센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간혹 그가 일하는 가게 옆을 지나가다 오토바이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고 오는 그를 만난다. 무더운 여름이면 길에서 둘이 쪼그리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 가끔 일이 힘들다고 투정도 하지만 친구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라고 하는 유혹에도 참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된다.

그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서 꽤 많은 액수의 돈도 저축해 두었다고 한다. 올해 봄에는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재개발 되어서 한 달 후에는 새로 구입한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며 이제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싶다고 한다.

나도 청소년 시절에 가정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힘이 되어준 누군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안개 속에서 헤매다가 집으로 가는 이정표를 만나 길을 찾은 것처럼 K도 삶의 안개 속에서 이정표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앞날을 향해 씩씩하게 나아가고 있을 K에게 행복한 미래가 약속처럼 다가오기를 소망하며 힘찬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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