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놀이터
남편이 정년퇴직한 지 9년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조용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흙을 만지며 꽃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2022년부터 2년간 전원생활을 했다. 시골은 공기도 좋고 조용하지만 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아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남편은 시골 생활을 재미있어했기에 아쉬움이 남는 듯 보였다. 고민 끝에 ‘세컨 하우스’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이런 저런 사정에 의해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 ‘주말 농장’이었다.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200평 밭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밭이 생기자 무척 좋아했다.
남편은 2년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밭농사를 시작했다. ‘주말농장’이라고 하지만 이틀에 한 번 정도 나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집에서는 유튜브로 농사짓는 방법을 공부하고, 여름에는 아침 6시에 나가 저녁 8시에 귀가하니 직장에 다니는 것 같다고 매우 좋아한다. 밭에 가는 날이면 낫과 호미를 챙기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들떠 있는 남편에게 말한다. “밭에 아기를 두고 온 엄마가 아기 보러 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도 좋아요?”
같이 밭일을 해보니 할 일이 많았다. 어느새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풀도 매어야 하고 고춧잎도 아랫부분을 따줘야 했다. 고추가 넘어지지 않도록 끈으로 묶어주어야 하고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약도 뿌려야 하며 거름도 주어야 하니 일이 끝이 없었다. 남편을 돕기 위해 고랑 만들고 씨앗 심는 일을 배우고 난생처음 잡초 뽑는 일까지 해 보았으나 결코 만만치 않기에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핀잔으로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이 또한 함께 일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밭일을 3시간 정도 하니 싫증도 나고 허리와 다리도 아파왔다. 그래서 언제쯤 일을 끝낼 거냐고 남편을 재촉한다. 그러고 나무 그늘에 앉아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소리친다.
“당신은 개미, 나는 베짱이!”
남편은 밭일을 하면 전화도 받지 않고 점심식사도 거르고 일만 한다. 간식을 싸주어도 그냥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 걱정스러워 여러 번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일하다 보면 간식 생각도 안 난다는 것이다. 목이 마르면 오이를 따서 먹거나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밭에 가면 남편은 여기저기 익어가는 열매를 보여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남편의 놀이터는 산 밑에 있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옆에는 저수지가 있고 냇물이 흐른다. 뻐꾸기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고 황소개구리 소리도 들린다. 도심에서는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들리지 않았을 자연의 소리에 스며들며 나는 낭만과 여유를 덤으로 받아 마음이 풍요로워져 콧노래를 부른다.
올해는 고추, 토란, 호박, 딸기도 심었다. 해바라기 꽃과 봉숭아꽃도 피었다. 식물이 새싹을 틔우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을 보면 그는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남편은 심는 기쁨, 나는 주는 기쁨을 누린다.
“와! 종합선물세트, 너무 행복해요. 오늘은 가지전에 내일은 가지무침, 고추도 적당히 맵고 오이는 아삭아삭, 후식으로 토마토까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는 이웃에게 이런 문자도 받았다.
흙투성이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늦은 저녁에 돌아와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하면서 안마를 해달라고 하는 남편을 보면 속이 상하지만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집에 들어온 개구쟁이 아들 같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온다.
저녁 식탁에는 밭에서 따온 호박으로 남편이 찌개를 만들고, 양푼에 가지나물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칭찬이 저절로 나온다. “당신이 고생해서 수확한 거라 정말 맛이 있어요.” 식사 후에는 둘이 TV 앞에 앉아 농작물이 자란 이야기를 하며 고구마 순 껍질을 벗긴다. 남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우리가 키운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니 이것이 행복이네.”
나도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행복이 별것 있나.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지.”
남편에게 놀이터가 시간을 보내는 큰 즐거움을 주고 있어서 계속응원하려고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밭일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놀이터이자 일터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행복은 작은 것에서 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