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믿는다

by 난척선생

음, 그러니까...

보험회사에 근무한 지가 올해 들어 24년 차가 된다. 그동안 여러 보직을 거쳐왔는데 지난 4월에는 다시 지점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주중에는 가족들과 떨어져 이곳 거제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간 수차례 지점장 직무를 수행했지만,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건 지점장이란 자리가 참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다. 하기야,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직업이든 힘들고 어렵기는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좌우지간 보험회사의 지점장이라면 한 달에 반 이상을 가슴 한편에서 치밀어 오르는 스트레스로 인해 머릿속은 철사 타래가 어지럽게 엉켜있는 것처럼 복잡다단할 것이고, 머리 위에는 누가 쇠모루를 털썩 올려놓은 듯, 몸도 마음도 무거겁기만 한 그런 자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보험회사의 지점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져 있고, 그 구성은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보험회사의 지점장은 각양각색의 여성들로 구성된 조직을 이끌면서 지점의 성과목표를 매달 달성해야 하는 책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남성이고 지점장 보직을 맡고 있다면, 여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먼저 뒷받침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점이란 조직을 이끌어 가기가 여간해선 쉽지 않을 것 같다. 한때는 보험회사에서 지점장을 하려면 성격이 타고났든지, 아니면 여성학 혹은 여성심리 심화과정 정도는 이수하고서야 그럭저럭 지점장으로 버텨나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긴, 여성에 대해 잼병이었던 나 같은 사람도 여성집단 속에서 부대끼며 차츰차츰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화성에서 온 투박한 남자가 금성에서 온 민감한 여자를 고스란히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와 살면서, 또 여성들로 가득 찬 보험회사를 20년 넘게 다니며 비로소 여성이라는 특별하고도 신비스러운 대상에 대해 겨우 알기 시작한 나 같은 부류에게는 말이다. (참고로, 나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아들 둘, 여자라고는 엄마 한 사람 밖에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아무튼 이런 지점 내의 성과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지점장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조직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보험회사의 지점이라고 하는 조직은 지점장 혼자의 의지와 욕심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보험 설계사라고 알고 있는, 성원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에너지와 성과가 모여 한 달의 마감이 결정되기 때문에 만약 지점장이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교감하지 못한다면, 목표성과를 이루어 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자격증 시험이나 글쓰기처럼 한 개인이 어떤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면, 싫든 좋든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보험회사의 지점이란 곳은 일의 성과가 지점장 본인이 아닌 영업조직, 즉 보험설계사에 의해 결정되기에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점 성과목표 달성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일이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점장이 되어보니 이것은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컨트롤하기도 만만치 않은데 하물며 타인까지. 그리고 그것이 여성집단이라면야.

지점의 일(성과)은 잘 풀려나다가도 한순간에 꼬여버리기도 하고, 지독하게 안 풀리다가도 어떤 계기로 인해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일이 술술 풀리기도 해서,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딱히 어떤 구체적인 이유나 원인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지점이라는 조직은 꼭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24년을 보험회사에 몸 담고 있는 나로서도 지점이라는 조직의 생태는 잘 알 것 같다가도, 때로는 아주 생뚱맞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 지점이 어떻게 해서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꼬집어 말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저녁 무렵 숭어가 갑자기 물 밖으로 튀어 오른 까닭을 모르고, 지난주 출근길에 보았던 비둘기 두 마리는 왜 그렇게 서로를 죽도록 쪼아댔는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지점 또한 어째서 갑자기 잘 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일이 안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차리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점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지점장이라는 사람이, 지점의 성과결과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대답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대략의 추측일지라도 원인과 결과를 나름으로 예측하고 도출해내야만 하는 것이 지점장의 책무인 것이다.

매일 예측불가한 일들은 지점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지점장이라면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그때그때 마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리더는 조직과 그 성원에 대한 피드백을 해나가면서, 최종적으로 그 결과에 대해 크고 작은 책임을 전부 져야 하는 사람이다. 책임소재가 어떻든 간에 모든 결과의 공과는 모두 리더의 것이 된다.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제법 부담스러운 일이다.(적어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 자기 자신도 책임지기 벅찬 노릇인데 타인(소속 구성원)과 그들이 속한 조직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게 다가온다.

하지만 져야 할 책임이 커질수록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갔다는 의미이고, 이에 따른 혜택은 전보다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에 따른 그만큼의 성과가 따라온다는 말이다.

당신이 책임자 혹은 조직장과 같은 직위에 있다면 그 중압감은 상당하다. 그래선지 요사이 직원들을 보면 지점장으로 발령 나는 것에 대해 선뜻 내켜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지점장 직무를 제의받았을 때 잠시 망설였던 것은 근무지가 원거리인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지점장이란 타이틀이 주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아무튼, 여차저차하여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고, 짐작했던 대로 쉽지 않은 날들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점장이 되고 보니 한 달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팍팍하고 빠듯하게 흘러가서 머릿속이 먹먹한 날들이 많았다. 신기한 것은 이런 와중에도 약간의 숨 쉴 틈은 있다는 것이다. 이런 틈은 삶이 참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에 우연하게 발견되기도 하고, 애써 찾아내기도 하며, 그냥 저절로 내 앞에 놓여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틈조차 찾을 수 없는 날도 있는데, 바로 어제가 그랬다. 그저 힘든 하루였다는 말 밖에는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여태 풀리지 않는 지점상황에 몹시 짜증이 났고, 일로 엮인 사람들 모두가 피곤하게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지점 분위기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아,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결정타가 날아왔다.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요즘 들어 부쩍 기운이 빠져있는 설계사에게 격려의 선물을 보냈는데, 이게 오히려 화근이 되어 버렸다. 가뜩이나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애써 호의를 베푼 누군가에게 세차게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오후 내내 지점장실만 지키고 있었다.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한 채 그저 참호에 틀어박혀 있는 군인처럼 멍하니 앉아있다가 퇴근시간을 한참 넘기고서야 조용히 지점을 빠져나왔다. 패잔병처럼 맥없이 내려앉은 어깨와 터덜터덜 힘이 풀린 두 다리는 힘들고 지친 내 하루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숙소로 들어왔지만 밥을 먹기도, 저녁마다 하던 운동도 하기 싫어졌다. 더군다나 며칠 전부터 시작된 장마로 방 안은 덥고 습했다.

자꾸만 일이 풀리지 않고 그래서 의욕은 떨어지고, 자신감 마저 뚝 떨어지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머릿속에 들어찬 걱정이나 고민을 해결하려 해도, 풀리지 않고 오히려 마음만 더 복잡해지고 무거워진다는 걸.

하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이때, 역설적으로 꼭 해야 할 일이 바로 몸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제 막 보험영업을 시작하려 하는 신입 설계사에게 늘 말해 왔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머리(정신)가 무겁고 아프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몸(신체)을 괴롭히라고, 그러면 더 이상 머리는 안 아프게 된다. 머리가 계속 아프면 우리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된다. 머리가 아픈 것보다 차리리 몸이 아파야 한다고. 마음이 괴로울 땐, 몸을 쓰는 일을 해야 머리가 아프지 않고, 상황을 돌파할 힘이 생긴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난관을 직접 겪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몸을 쓴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역경이 덮치게 되면 적극적으로 '몸을 쓴다'는 행위는 어렵게만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타인에게 숱하게 말해왔지만, 이를 스스로 직접 겪어보면 도무지 적극적으로 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어제가 그랬다. 숙소에 들어오니 운동이며 식사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상황이 이럴수록 적극적으로 몸을 쓰는 행동인 운동은 좋은 처방이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순간을 마주하고 보니 공기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의욕은 한순간에 쭈글쭈글해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랜 경험과 습관은 무기력해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워준다는 것이다.

뭐랄까, 이건 의지라기보다는 오래 길들여진 습관이 등 뒤에서 나를 떠밀면서 몰아간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러니까 습관에 떠밀려 몸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입에서는 오늘은 정말 운동하기 싫다고 중얼대고 있지만 습관은 옷을 갈아입게 하고, 운동도구를 챙기게 하는 것이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운동을 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습관은 벌써 이런 내 기분을 앞질러 가버렸다.


정말 하기 싫지만 그럴수록 몸을 써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고 힘들지만 억지로라도 하게 되면, 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기 싫지만 막상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 복잡했던 머릿속은 단순해지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운동하기를 잘했다. 정말 잘했다.'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스스로를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었다.

노동이 되었든, 운동이 되었든,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는 행위는 소중하다.

몇 분 동안 의자에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이윽고 심호흡 몇 번을 했다. 스마트 폰에서 유튜브를 열고 저장된 홈트레이닝 동영상을 플레이시켰다. 영상이 시작되자 몸이 반응했고, 나는 어느새 영상 속 유튜버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운동을 하면서 '오늘은 정말 하기 싫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것 같다. 바로 그때, 거칠게 내뱉는 유튜버의 말이 머릿속으로 번쩍 꽂혔다.

"나만 힘든 거 아니에요. 다들 똑같이 힘들어요. 자, 조금만 더 버티면 돼요. 힘들어도 버티는 거예요. 버티세요. 그냥 버티는 겁니다. 시간, 금방 지나가요. 그때까지 버티는 거예요."


지난 4년 동안 들어왔지만 그냥 흘려보내던 말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유튜버의 이 말이 꼭 나를 꼬집어하는 말처럼 들렸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임 후 일주일 정도 지나자 지점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렵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현실은 예상치를 조금씩 빗나가기 마련인 것이다. 세상만사가 뜻대로 생각대로 풀려나간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지난 석 달 동안 일이 풀리지 않아서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는 날이면 펜을 들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포스트잇에다 내 의지를 꾹꾹 눌러 적고는 부적처럼 한쪽 벽면에 이런 글을 차곡차곡 붙여 두었다.

"버텨라. 기회는 온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할 수 있는 걸 해내자."

"견뎌 내는 것도 이기는 것이다. 당당하라. 너의 과거는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니 너 자신을 강건하게 믿어라."

"버텨 내는 것도 승리를 위한 준비임을 잊지 말자. 어설픈 감상에 젖어들기보다 현실을 냉철하게 살펴보자."

"혼자 하려 하지 말고, 함께 하자. 버티고, 함께 하는 것도 용기라고 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지나간답니다."

그간 천 번도 넘게 보고 듣던 유튜버의 '버티라는' 말이 지점장실 벽면에 붙여둔 문구들과 오버랩되며 번개처럼 번쩍하고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상체운동을 하면서, 정말 하기 싫다는 말 대신에 '그래, 나만 힘든 게 아니다. 그러니 버티면 된다.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라고 말했다.

유튜버를 따라 하체운동을 하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버티는 거다. 조금만 더 버티자. 다 지나간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유튜버를 따라 복부운동을 하며 쥐어 짜내듯 내뱉었다.

"견디자. 극복하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운동이 다 끝나갈 즈음에는 흘러내린 땀으로 속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주술이라도 걸고 있는 사람처럼 입에서 이런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래, 버티는 거다. 너 자신을 믿고 버티는 거다. 정신 차리고, 그간의 나를 믿자. 지난 24년 동안의 나를 믿자. 지난 24년은 성실했고, 동료에게 폐 끼치지 않았으며, 회사로부터 월급 받는 것에 떳떳했다. 주어진 일은 대부분 열심히 했고,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해왔다. 내 삶에 부끄러운 몇 장면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떳떳하게 살아왔다. 그러니 내 지난 시간을 믿자."

다음과 같은 맹자의 문구도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그 몸을 지치게 하고, 육체를 굶주리게 하며 또한 생활을 궁핍하게 하여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틀어지게 만든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해낼 능력을 길러주기 위함이다.(맹자 고자장구 하편)’

"그래, 이렇게 운동을 해온 것처럼 매일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도약할 때가 온다. 그때까지만 스스로를 믿고 버티며, 조금씩 나아가 보자. 적어도 내가 나를 배신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일찍이 푸시킨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삶이 그대를 속인 것 같더라도'로 고쳐 써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삶은 그저 우리를 무심하게 지나갈 뿐, 삶은 결코 우리를 속인 적이 없는 것 같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오늘의 내 모습은 수많은 확률 중 하나가 꼬리를 물고 파생되어 오다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인해 지금 내 앞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리라. 생존을 향한 부단한 몸부림 속에서 말이다.

그러니 푸시킨의 말처럼 삶에 대해 더 이상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삶은 노력과 우연이 뒤섞인 도저히 증명하기 힘든 공식의 산물인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어쩌면 당신 탓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삶이 그대를 속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차분하게 돌아보자.

그러면 순순히 당신 앞에 떨어진 모든 것을 인정하게 되거나, 적어도 지금껏 살아온 스스로의 삶에 대한 믿음은 선명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명심하자. 삶은 한 번도 우리를 속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삶이 괴롭고 힘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애써 버티고, 이를 앙다물고 발버둥을 치며 발악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앞은 안개가 자욱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 본들, 결국 낭떠러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를 앙 다물고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보는 것이다. 나아갈 수도 없다면 억지로라도 버텨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앞이 꽉 막혀 있을 때에도 찾아보면 숨 쉴 구멍 정도는 있어서, 오늘 하루는 겨우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래서, 그렇게 버틴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 온다면, 솔직히 그다음은 나도 모르겠다.

뭐, 푸시킨의 말처럼 좋은 날이 올 수도, 아니면 더 우울한 날들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뒷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만 같다. 그저,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버텨왔으니, 그걸로 된 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글을 쓰는 것조차 잘 풀리지 않고 있다.

내용은 엉망이고, 연결은 매끄럽지 못하고, 표현은 상투적이고, 빌어먹을! 문장은 비문에다 부사나 직유 따위가 너무 자주 터져 나오는 것에 짜증이 날 정도다. 당장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 글쓰기를 때려치우고 싶지만, 며칠 동안 여기에 들인 시간과 노고가 아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그냥 쓰고, 고치고, 또 쓰고, 또 고치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런 다음이라면, 글이 엉망인 채라도 크게 실망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삶은 지금까지 우리를 속인 적이 없고, 그저 우리를 관통할 뿐임으로.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내 지난 시간을 온전히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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