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말하지 못한 사랑

by 에투왈


모네를 찾아가는 길


7_f72Ud018svc1p0wvpnb1rzv7_bxeu2s.png?type=e1920_std * 보주광장에서 마르모탕모네미술관 가는 길


보주 광장을 떠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으로 향했다. 빠리의 심장에서 서쪽 끝까지, 지하철로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그 거리는 마치 과거로 거슬러 가는 길 같았고, 모네가 붓으로 빚어낸 연못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7_h29Ud018svc1odoljefyrnq6_bxeu2s.jpg?type=e1920_std * 세탁부, 로트렉, 1886, 개인소장


나는 우연히 에멜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을 읽다가 책 표지에서 로트렉의 그림을 마주쳤다.
로트렉의 이 그림이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전시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이 미술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낯선 단어 같던 이 미술관이 언제가 꼭 가야만 할 나의 워너비 리스트로 바뀌어 있었고, 마르모탕은 그림 속 햇살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이 나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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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이 자리한 곳은 ‘라늘라 공원(Jardin du Ranelagh)’이라는 이름의 조용한 녹지였다. 지도에서 보면 빠리의 서쪽, 푸른 숲의 가장자리다. 시간이 멈추는 곳,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드는 그런 공간이었다. 바로 그 공원의 끝자락, 푸르른 나뭇잎 아래 조용히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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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귀부인의 저택이 인상주의의 성지로


이 미술관은 원래 ‘오뗄 마르모탕(Hôtel Marmottan)’이라는 이름의 개인 저택이었다. 19세기말, 부유한 귀족 쥘 마르모탕(Jules Marmottan)이 나폴레옹 시대 회화와 고전 미술을 수집하기 위해 이곳에 정착하며 이 저택은 점점 작은 미술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의 아들인 폴 마르모탕은 아버지의 유산을 문화유산으로 남기고자 이 저택과 모든 예술품을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에 기증했고, 그렇게 이곳은 1934년 공식적으로 ‘마르모탕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공공 미술관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전환점은 그 후였다. 1966년, 모네의 차남 미셸 모네는, 죽기 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아버지 모네의 작품 컬렉션을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 소속 기관인 마르모탕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에는 모네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만 남겨졌던 미공개 작품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그 순간부터 마르모탕은 인상주의, 무엇보다 ‘모네’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성지로 변모했다.

지금 이곳엔 모네의 대표작이자 ‘인상주의’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도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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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 모리조의 세계로

계단을 올라 2층에 올랐다. 베르트 모리조의 방이었다. 연보라 벽면엔 부드러운 붓질이 살아 있었고, 그림 속 소녀들의 눈빛은 얼음장 아래 흐르는 샘물 같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아이가
도자기 그릇 속에 손을 담근 채 물고기를 바라보던 그림 앞에서는 어느 여름날 정오의 정적이 들리는 듯했다. 그림이 아니라, 기억을 바라보는 기분, 혹은 오래된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엿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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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양식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이기도 한 그녀는 19세기 빠리 사교계에서 유독 빛났던 존재였다. 그림은 조용했고, 부드러웠고, 속삭이듯 섬세했다. 그리고 그녀의 삶도 그랬다. 언뜻 평온해 보이지만, 속에는 수많은 감정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그녀보다 열두 살 많은 화가였고, 모리조가 처음 그를 만난 것은 1868년 살롱전에서였다.


그녀는 마네의 그림을 존경했고, 마네 역시 그녀의 재능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이후 마네는 몇 년 동안 그녀를 모델로 수차례 그림을 그렸다. 그 유명한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도 그중 하나다. 제비꽃은 오랫동안 특히 19세기 프랑스에서 연인에게 선물하는 사랑의 상징이었다. 프랑스 시인 발레리는, '마네의 작품 중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화를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 고 말했다.

그림 속 그녀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정면을 바라보지 않았고, 입술은 다물려 있었으며, 눈빛엔 늘 어딘가 멀리 있는 것 같은 공기가 감돌았다. 마네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 감정은 끝내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네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그림 속 모리조는 늘 ‘닿지 않는 거리’를 품고 있었다.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했고, 그렸지만 함께하지 않았다.

8_g3aUd018svcmn1nqkxevp6k_bxeu2s.jpg?type=e1920_std * 와이트섬에서 외젠 마네, Berthe Morisot, 1875, Musée Marmottan Monet* 모리조가 그린 외젠 마네와의 신혼여행

* 모리조가 그린 외젠 마네와의 신혼여행



모리조는 결국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Eugène Manet)와 결혼했다. 그 역시 화가였지만 형처럼 유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헌신적이었고, 예술적 자유를 지지해 주었다. 그 부부 사이에 태어난 딸 줄리는, 모리조가 가장 자주 그린 모델이 되었다.
“사랑은 그림 같았다. 가까워질수록, 물러나야 했다.”

모리조는 마네에게서 독립해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해 갔다. 빛보다 조용한 색, 목소리보다 깊은 침묵, 그녀는 여성의 일상, 엄마의 눈길, 창가의 햇빛 같은 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마네와 모리조, 그 둘의 관계는 뜨거운 로맨스라기보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마네 그림 속 특유의 슬픔이 스며 있었다. 그녀가 지켜본 세계는 조용했고, 그래서 더욱 강렬했다.


“앙프레시옹 솔레이유?”

그런데, 모네는 어디 있는 걸까? 나는 도무지 <인상, 해돋이>가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일출은 어디 있나요?"
직원은 나를 힐끔 보며 이렇게 되물었다. "앙프레시옹... 솔레이유(soleil)?" 그 순간, 나는 '솔레이유'라는 단어를 몰랐다. 하지만 '앙프레시옹'으로 짐작했고, 나는 그냥, "위(Oui)"라고 대답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세요."
모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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