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안쪽에는 위고의 문장처럼 엄숙한 붉은 벽지와 금빛 거울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커다란 그림 한 점이었다. 검은 외투를 휘날린 채 절벽 위에 서 있는 위고. 얼굴은 하얗게 빛났고, 배경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였다. 그는 문학가라기보다는 한 시대를 짊어진 예언자처럼 보였다.
그러다 한 켠에서, 나는 꼬제트를 만났다. 너무 작고, 너무 가늘고, 조용해서 처음엔 눈에도 띄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에서 미처 이름조차 얻지 못한 문장처럼, 그녀는 전시장의 한 모퉁이에 말없이 서 있었다.
양동이를 들고 힘겹게 서 있는 소녀. <레 미제라블>의 한 페이지, 딱 그 대목이 떠올랐다. 먼지 가득한 마당 한쪽에서, 작고 말 없는 아이가 물 한 바가지를 채우는 데도 숨을 삼켜야 했던 순간. 조각은 그 장면을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였고, 말이 없지만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정작 오래 남은 건 사진이 아니었다. 내 안에 조용히 내려앉은 그 소녀의 침묵. 마치 세상의 모든 울음이 그 작은 입술 안에 잠겨 있는 듯했다.
위고는 그녀를 통해 세상의 비명을 썼고, 작가는 그녀의 등을 통해 그 비명을 조각했다. 그 소녀는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외면하고 있는가.
전시를 마치고 광장으로 다시 나왔다. 주변의 식당은 모두 긴 줄이었고, 배는 고팠다. 결국 빵집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사 들고, 광장 벤치에 앉았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빵 속엔 잠봉과 버터만이 들어 있었다. 이 단순한 맛이 왜 이렇게 황홀한지, 알 수 없었다.
내 등 뒤에선 할머니 두 분이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voila’, ‘merci’ 같은 익숙한 말이 들릴 때마다 반가웠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살던 말이 나를 다시 찾아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바게트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풀밭엔 여전히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빠리는 북위 48도 51분에 놓여 있다. 지도로만 보면 꽤 높은 곳. 중국 하얼빈이나 일본 홋카이도 북단보다 위쪽에 있으니, 겨울이 길 수밖에 없다. 햇빛은 짧고, 비는 자주 내린다. 하루 종일 잿빛 하늘 아래서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셔야 하는 날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장대비가 아니어도 우산을 들고 다니고, 카페 안에서는 커피보다 우울이 더 짙게 내려앉는다. 이 도시의 겨울에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들이 많다. 의사들이 말하듯, 우울증을 앓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긴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4월이 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시 전체가 환호성을 지른다. 사람들은 집 문을 박차고 나와 거리로, 공원으로, 강변으로 향한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새가 날개를 펴듯, 모두가 제각기 봄을 만끽하기 위해 자연 속으로 뛰어든다.
그 봄의 문이 열린 날, 나는 보주광장에 있었다. 분수는 햇살에 반짝이며 물결을 흩뿌리고, 잔디 위에는 온갖 봄의 풍경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셔츠를 풀어헤친 채 잔디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은 채 태양을 마신다. 옆자리의 여자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바람이 장난치듯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멀리 분수 옆에선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은 물방울처럼 가볍게 튀어 광장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담요 위에 앉은 친구들은 와인병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잔에 담긴 건 와인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던 건 아마도 햇살이었다.
그날의 빠리는, 기다림 끝에 만난 연인처럼 따뜻하고 반짝였다. 겨울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봄이 잔디 위에 누워 있는 날이었다.
이 풍경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라 그르누예르>나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공원의 소풍>을 닮아 있었다. 미술 속의 장면이 현실로 나와 있는 듯했다. 가끔은 한 장의 그림이, 한 계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에게 르누아르의 〈라 그르누예르〉는 그런 그림이다. 여름, 물, 햇살, 그리고 어딘가 가볍게 떠 있는 듯한 마음.
* La Grenouillère, 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69
그림 속은 시끌벅적하다. 세느 강 위에 떠 있는 나무 데크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는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다. 강물 위에는 노를 젓는 보트들이 가볍게 미끄러지고,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은 물속에서 놀고 있다. 그 모든 풍경이 파스텔처럼 부드럽고 흐릿하게 흘러간다.
이곳은 실제로 파리 근교, 부지발이라는 마을에 있던 수상 카페였다. ‘라 그르누예르’라는 이름은 ‘개구리 연못’이란 뜻인데, 그 시절 사람들은 이곳을 놀러 온 젊은 파리지엔을 은근히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어딘가 장난스럽고, 조금은 허무맹랑한 여름날의 꿈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그림 앞에 서면, 문득 강가의 벤치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바게트를 한입 베어 물고, 물 위를 떠다니는 보트를 바라보는 순간. 한낮의 소란 속에서도, 마음 어딘가에 조용한 파문이 번지는 그런 기분. 그건 어쩌면, ‘그림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그림 속에 들어가 사는 시간’ 일지도 모른다.
광장과 위고, 꼬제트와 콰지모도, 바게트의 바삭한 식감까지. 이 모든 것은 각각의 순간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였다. 마레 지구의 붉은 벽돌 속엔 문학이 있고, 문학 속엔 미술이 있고, 미술은 다시 광장으로 흘러나와 햇살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