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빠리 미술관 산책

빠리의 김칫국

by 에투왈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을 나섰다. 다리는 다시 따끔거렸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인상, 일출>을 눈앞에서 마주했고, 그 감동이 아직도 가슴 안에서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도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i_2j1Ud018svcpjpf0j88irtm_bxeu2s.jpeg?type=e1920_std


i_5j1Ud018svc2td8f6zkzamc_bxeu2s.jpeg?type=e1920_std


길 건너 라넬라 가든(Jardin du Ranelagh)에는 햇살이 잔디 위에 부드러운 담요처럼 깔려 있었다. 어른들은 책을 읽으며 오후를 느릿하게 넘기고, 아이들은 풀잎 위에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 소리가 바람에 실려 공원 전체를 감싸 안았다. 작은 부스 앞에서 목을 축이고, 차가운 한 모금이 몸을 타고 내려갔다.



f_8d5Ud018svczoipew7m231e_bxeu2s.png?type=e1920_std


원래 오늘 계획은 훨씬 화려했다. 미술관을 나온 뒤, 볼로뉴 숲을 가로질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들를 예정이었다. 유리와 빛으로 빚어낸 듯한 건물, 마치 바람에 돛을 펼친 배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숲 속에서 반짝일 것을 상상했었다. 그 옆에는 한국정원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어, 먼 타국에서 잠시 고향의 공기를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몽소 공원까지 걸어가, 반 고흐와 모네가 즐겨 찾았던 그곳의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은 라파예트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화려한 불빛을 배경으로 저녁을 먹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오후 햇살처럼 금세 사라졌다. 발바닥은 불씨처럼 따끔거렸고,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한 걸음 더 걷는 건 무리였다. 숲은 멀리 초록 물결처럼 보였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이 아득했다.


c_5j3Ud018svc1caw1viuva1vn_bxeu2s.png?type=e1920_std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초록빛 그림자가 발끝에 붙어 따라왔다. 라 무에뜨(La Muette, ‘무음’ 혹은 ‘벙어리’) 역은 이름부터 조금 묘하다. 이곳에는 옛날 왕족이 머물던 성이 있었고, 프랑스 최초의 유인 열기구가 날아오른 곳도 바로 이 근처였다. 전쟁 때는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잡혀간 아픈 기억도 품고 있다. 그런 사연을 알고 나니, 이 역은 단순한 출발지가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를 품은 문처럼 느껴졌다.


열차 문이 닫히자, 오후의 빛이 창밖으로 미끄러져 갔다.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다. 이 역은 원래 샹젤리제 거리 이름을 따서 불렸지만,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4_5bcUd018svc1s7notziurx9q_bxeu2s.png?type=e1920_std


빠리의 지하철은 도시의 혈관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다. 어디서든 15분만 걸으면 역에 닿고, 철로는 깊지 않아 몇 계단만 내려가면 바로 열차를 만난다. 가장 놀라운 건 공기였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자, 서늘한 바람이 동굴 속의 숨결처럼 몸을 감싸왔고 비 온 뒤 숲 속처럼 맑았다. 지상의 공기보다 오히려 더 깨끗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구불구불 미로 같은 통로 속에서도 이 신선함을 지켜내는 비밀이 궁금했다. 다만, 비싼 요금과 부족한 편의시설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서울의 지하철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편리한 이동수단일 것이다.


루브르궁전(Palais Royal – Musée du Louvre)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오자, 바람 속에 도시의 오후 냄새가 스며 있었다. 루브르 옆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내 마음속엔 여전히 모네의 바다가 잔잔히 출렁이고 있었다.

b_77gUd018svc1nkjpr9nhalcw_bxeu2s.jpeg?type=e1920_std
b_h7gUd018svc1qrnja45x6wg_bxeu2s.jpeg?type=e1920_std


첫날, 나는 2만 9천 보를 넘게 걸었다. 발끝이 땅에 닿는 순간마다 피로가 쌓였다. 결국 탈진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저녁도 건너뛴 채, 겨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도 만 보를 훌쩍 넘겼다. 식당 의자에 앉을 힘조차 남지 않은 하루였다.


f_dd6Ud018svc2is7cbzak32p_bxeu2s.jpg?type=e1920_std


5_bd2Ud018svcezwx6x9ped74_bxeu2s.jpeg?type=e1920_std


다행히 낮에 마레 지구에서 사둔 빵이 있었고 한국에서 챙겨 온 ‘비상식량’ 김치국이 기다리고 있었고 뜨거운 국물에 스며든 익숙한 향이 혀끝을 스칠 때 그것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감싸는 위로였다. 작은 용기 속 김칫국이 온몸으로 번져 나가며 조금은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에는 고요한 밤하늘이 흘렀다. 오늘의 긴 여정을 조용히 위로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