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빠리 미술관 산책

카페 게르부아, 인상주의가 태어난 작은 테이블

by 에투왈


그리고 젊은 화가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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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앞에 섰을 때, 내 머릿속에는 또 다른 그림이 떠올랐다.
1863년 살롱전에서 마네의 작품은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낙선했지만, 같은 해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관객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로마상을 받고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카바넬은, 그해 아카데미 회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미술학교 교수직까지 거머쥐며 당대 최고의 스타 화가가 되었다. 그의 화풍은 앵그르의 고전적 선과 18세기 회화의 관능미가 섞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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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화제가 되면서 그의 주위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1863년부터 마네는 바티뇰 거리, 클리시의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드나들었고, 점차 그곳은 젊은 화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바지유, 드가, 랑시르, 라투르, 피사로, 모네, 세잔 등은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입구 왼쪽 두 개의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함께 활기차고, 경쾌하며, 빛나는 새로운 회화 양식의 토대를 마련했다. 인상주의가 탄생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 동네 카페에서 미술사의 한 페이지가 쓰인 것이었다.

잘려나간 <풀밭 위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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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은 곧 모네의 <풀밭 위의 점심>으로 옮겨갔다. 마네와 같은 제목을 붙인 이 그림은 마네를 향한 오마주였다. 안타깝게도 작품을 선물 받은 사람이 창고에 방치하여 일부가 잘려 나갔지만, 남은 부분으로도 모네의 젊은 기백과 마네에 대한 존경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마네가 그린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화 앞에 섰다. 흰 얼굴 곁에 놓인 작은 제비꽃 장식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제비꽃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남자가 건네는 선물이었으니, 마네가 모리조를 그리며 제비꽃을 배치한 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은밀한 고백이었다. 프랑스 시인 발레리가 “마네의 작품 중 모리조의 초상화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 그림 속에 담긴 감정의 무게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비꽃의 여인, 베르트 모리조

모리조는 프라고나르의 증손녀라는 배경을 가졌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마네와의 만남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과 나란히 활동하며 여성 화가로서 자기 길을 개척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뮤즈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빛과 순간을 포착하는 주체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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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영화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한국에서 <마네의 제비꽃 연인: 베르트 모리조>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재현된다. 영화는 마네와 모리조 사이의 설레는 긴장과 애틋한 감정, 그리고 여성이자 화가로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던 모리조의 고투를 그려낸다. 영화 속 한 장면, 제비꽃 장식을 한 채 마네의 화실에 앉아 있는 모리조를 마네가 바라보는 순간에는 욕망과 존경, 연민과 좌절이 뒤엉켜 있다. 그러나 모리조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나는 당신의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림을 그릴 사람이다.”

결국 그녀는 인상주의 그룹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요람>, <정원에서>, <거울 앞의 여인> 같은 작품을 통해 ‘마네의 모델’이 아니라 ‘모리조’라는 이름 자체로 기억되었다. 그 길은 마네와의 관계가 열어준 길이었지만, 동시에 그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한 길이었다.

그림 속 제비꽃은 여전히 향기를 품고 있었고, 그 향기는 지금까지도 모리조의 목소리처럼 내 귓가에 남아 있었다.

en plein air(가득한 공기 안에서)

모리조의 초상화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는 문득 다른 생각에 잠겼다.
이 젊은 화가들이 어떻게 화실을 벗어나, 빛과 바람 속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
그 길에는 거창한 선언보다도, 작고 소박한 발명품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튜브 물감이었다.
튜브가 나오기 전, 화가들은 돼지의 오줌 방광이나 유리병, 도자기 용기에 물감을 보관했다.
핀으로 구멍을 내어 조금씩 짜 쓰는 번거로운 방식이었으니, 야외 작업은 늘 불편하고 버거웠다.
1841년, 미국 화가 존 랜드(John G. Rand)가 금속 튜브 물감을 발명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주머니 속에 빛을 담아 들고 다니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두 번째는 카메라였다.
사진은 회화의 임무를 바꾸어 놓았다.
형상을 정확히 옮기는 일은 렌즈가 대신했고, 화가들은 찰나의 빛과 순간의 시선을 포착하는 데 몰두했다.
드가의 무용수들, 카이유보트의 거리 풍경에는 그런 새로운 눈의 감각이 배어 있다.

세 번째는 증기기관차였다.
기차는 빠리의 화가들을 단숨에 교외로 데려다주었다.
아르장퇴유, 아스니에르, 옹플뢰르…
강과 들판, 바다의 빛이 이제는 하루 안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모네의 <생라자르 역>은 증기와 빛의 소용돌이를 그 자체로 현대의 풍경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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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들판> 앞에 섰다.
화면 가득 붉은 꽃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들판 전체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멀리 언덕은 채도를 낮춘 푸른 기운으로 물러서 있었고, 전경의 풀빛은 노랑과 초록이 섞여
햇빛에 부서지는 듯 반짝였다. 그 사이를 모자 쓴 작은 인물들이 지나가며 한낮의 시간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en plein air(엉 플래 네흐), '공기 속에서'라는 뜻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햇빛과 바람, 대기 속에 가득한 공기 자체가 화폭 위에 담긴 것이었다.
화실의 고요와 달리, 들판의 그림은 늘 시간과 싸워야 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바람이 달라지기 전에, 두세 시간 안에 붓질을 끝내야 했다.
인상주의의 화면은 살아 있는 날씨, 찰나의 공기로 가득 차 있다.

그날 뮤제 독세에서 나는 이해했다.
튜브 물감이 허락한 즉흥, 카메라의 발명으로 빛을 연구한 새로운 모습,
그리고 기차가 열어준 거리 덕분에,
젊은 화가들은 마침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실제로 겪은 시각적 경험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인상주의는 그렇게, 동네 카페의 작은 테이블에서 시작되어,

바람과 빛 속에서 마침내 세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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