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 미술관 산책 30>

생레미의 하늘 아래

by 에투왈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스스로 생레미의 요양원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옛 수도원으로, 아치형 회랑 사이로 라벤더 향이 흘렀다. 그는 이곳을 “감옥이자 피난처”라 불렀다. 하루는 발작에 시달렸고, 하루는 그림 앞에서 평화를 찾았다. “나는 병든 몸이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영혼이다.”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의사들은 보다 큰 공립 요양원을 권했지만, 빈센트가 그곳에 가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생레미 드 프로방스 남쪽, 천년 넘은 세월 동안 수도사들이 머물던 그곳은 바로 모솔의 사도 바울 수도원(Monastère Saint-Paul de Mausole)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전형적인 풍경이 주변을 감쌌다. 사이프러스, 포도밭, 올리브 숲이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었고, 하늘은 늘 짙푸른 빛으로 빛났다.



* 빈센트의 병실에서 중정을 바라본 모습


1807년, 메르퀴랭 박사가 이 수도원을 매입해 요양원으로 개조했다. 당시 이곳은 단 41명의 환자만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와 간병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했다. 무엇보다 빈센트에게 큰 행운이었던 것은, 테오의 특별한 요청 덕분에 병원 밖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스스로 이곳을 “Asylum, 안식처”라 불렀다. 창문에는 철창이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자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입원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정원으로 나가 붓을 들었다. 나무와 꽃, 올리브나무와 라벤더 사이를 거닐며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린 <아이리스>, <올리브나무>, <정원의 사이프러스> 같은 작품들은 그 평온의 시간을 담고 있다.

빈센트는 이곳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신선한 공기와 바람, 새소리와 꽃향기에 둘러싸여 있을 때만큼은 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나무와 꽃을 그렸고, 그 붓끝에서 태어난 작품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되었다.





그의 자화상(1889, 생레미)은 그 시기의 대표작이다. 푸른 회오리의 배경 속에 자리 잡은 침묵의 초상. 물결치는 붓질은 그의 내면의 불안을 시각화하고, 그 떨림 속에서도 묘하게 단단한 생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는 매일 거울 앞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내 얼굴은 내가 아는 유일한 모델이다.” 모델을 살 돈이 없던 그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인간의 모든 감정을 그렸다. 그것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자 고백이었다.

정신병동의 철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 하늘, 올리브나무를 그렸다. 밤이면 별빛을, 낮이면 사이프러스를 그렸다. 그리고 어느 밤, 하늘을 가득 채운 푸른 소용돌이 속에서 영원을 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불후의 명작 <별이 빛나는 밤>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 하늘은 희망의 노래였다.





이 작품에는 내 가족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아이 둘 모두 이상하게도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낯선 곳보다 집이 더 좋다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 그들이 스스로 여행을 원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큰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무렵 막 등장한 구글 아츠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아이는 신기한 듯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그림을 꼭 보고 싶어.”
그 말 한마디에 우리 가족은 길을 떠났다. 지금까지 온 가족이 갔던 두 번째 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여행은 단순한 미술 감상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함께 바라본 하나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자라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이 더 소중하다. 그때 함께 올려다본 그 하늘은, 어쩌면 지금도 우리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 무렵, 그의 동생 테오의 아내 요(요한나)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올겨울, 아마도 2월쯤 아기를 낳게 됩니다. 아들이길 바라고 있고, 아들이면 그리고 대부가 되어 주신다면 아이의 이름을 빈센트로 짓고 싶어요.” 요는 어쩌면 자신이 출산을 버텨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슬프도록 따뜻한 편지를 썼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제가 그이를 떠나게 되면, 그이에게 말해주세요. 우리가 결혼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말라고. 그이는 저를 정말 행복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죠.”



* Almond Blossom, February 1890


1890년 1월 이름이 같은 빈센트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새로운 생명을 위한 선물이었다. 가장 먼저 꽃이 피우며 봄을 알리며 새로운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몬드나무를 선택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자신은 여전히 병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사랑과 희망은 존재했다.



오르세 미술관의 푸른 벽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의 자화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림 속 눈빛은 단단하면서도 슬펐다. 고통을 견디는 인간의 얼굴, 그러나 결코 굴복하지 않는 예술가의 얼굴이었다. 그의 붓질은 이미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듯했다. 마치 손이 아니라 심장이 그린 그림 같았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한 노래의 가사를 떠올렸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고호라는 사나이도 있었는데.” 그 노래는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나는 그게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굶어 죽을지라도 산정에서 얼어붙은 표범.”

빈센트는 바로 그 표범이었다. 세상은 그를 미쳤다 말했지만, 그는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살아냈다. 고통 속에서도 색을 버리지 않았고, 절망 속에서도 빛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게으르게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실패하는 쪽이 좋다.”
그의 말은 고집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생의 의지였다. 그날, 오르세의 벽 앞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의 불행은 저주가 아니라, 열정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빈센트.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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