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유산이 남긴 집
아침 햇살이 잔잔하게 빠리의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가 포석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나는 오뗄 살레(Hôtel Salé, 피카소 미술관)로 가고 있었다. 17세기 귀족의 저택이던 이 집은 오랜 세월의 숨결을 품고 있다. 피카소의 유족들은 상속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작품의 가치는 국가 재정에 맞먹을 정도였고, 이를 현금으로 납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다행히 1968년 프랑스는 예술작품이나 문화재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다시옹 앙 페이망(dation en paiement, 물납제도)’을 시행했다. 덕분에 피카소의 많은 작품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남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오뗄 살레라는 오래된 저택이 그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벽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준비하며 100번도 넘게 그렸던 드로잉이었다. 선은 거칠고, 얼굴은 가면처럼 단순했다. 그는 세잔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자신의 언어로 써 내려갔다. 인간의 얼굴과 몸을 마치 '원, 원기둥, 원뿔'처럼 단순화했다. 평면을 해부해서 재조립하는 과정이 이 드로잉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의 파격적 실험에서 최초의 Cubisme(입체주의)이 태어났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1907년 피카소가 친구들을 불러 <아비뇽의 처녀들>을 공개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절친 브라크조차 “이건 공개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듬해 브라크는 가을 살롱에 <에스타크의 집>을 발표했다. 피카소가 세상을 뒤흔들기 전에 먼저 새로운 문을 연 셈이었다. 둘은 서로를 견인하며 현대미술의 문턱을 넘었다.
전시장을 걷다 보니,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성들의 얼굴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46세의 피카소가 빠리 지하철역 앵발리드에서 17세 소녀 마리 테레즈를 처음 본 순간.
“흥미로운 얼굴을 가졌군요. 당신의 초상을 그리고 싶습니다. 나는 피카소입니다.”
그 한마디로 시작된 인연, 그리고 새로운 작품들. 그의 삶은 예술 못지않게 파란만장했다.
얼마 전 남프랑스 앙티브의 뮤제 피카소를 방문했을 때, 일행 중 연세가 많으셨던 한 분이 말했다.
“도대체 피카소는 뭘 먹고 그렇게 건강했던 걸까?”
그날 모두 웃었지만, 돌아서 생각해 보면 그 질문 속엔 작은 진실이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에너지, 소진될 줄 모르는 생의 힘. 예술 이전에, 그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나는 피카소가 몽마르트르 언덕의 낡은 세탁선에서 보냈던 가난한 시절을 떠올렸다.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화가이지만,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첫 발걸음은 프랑스 빠리의 몽마르트에서 시작됐다. 그곳에서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며 자신을 견디고 있었고 청색 시대의 쓸쓸한 시선은 한없이 인간적이었다.
1903년작 <La Vie,생(生)>은 그렇게 태어났다. 사랑과 욕망을 품은 누드 커플, 생명의 무게를 안은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배경 속 두 장의 드로잉은, 인간의 숙명 그 자체처럼 보였다. 인생의 반 고비를 훌쩍 넘어서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삶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했다. 젊은 시절엔 앞만 보고 달리는데 바빠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지만, 이제는 그림 속에서 나의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삶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의 푸른 자화상에서 마주한 눈망울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뮤제 피카소를 나와 퐁피두 센터로 향하는 길, 빠리는 고요한 아침을 지나 낮의 활력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흘러드는 빛이 길을 덮고, 바람은 잔가지 사이를 조용히 흔들었다. 나는 그 빛과 바람 속에서 피카소가 남긴 흔적을 가만히 더듬으며 다음 여정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