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치유의 언덕에서
한낮의 거리는 따스했다. 올해 퐁피두센터는 보수를 위해 문을 닫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걸작들을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수잔 발라동의 회고전을 보게 된 건 행운이었다. 그녀는 서커스단 곡예사로 살다가 추락사고로 무대를 떠나야 했고 몽마르트에서 모델 일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르누아르와 로트렉의 모델을 하다가 에드가 드가의 지지로 화가가 된 발라동의 길은 늘 벼랑 끝과 닿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전시장 안에서 <푸른 방>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는 단순한 자화상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담배를 피우는 여성이 옷을 입고 있고 발치에는 그녀가 읽고 있을 책이 놓여 있었다. 전통적인 누운 여성은 누드화다. 누운 여성을 남성에게 보여주는 ‘대상’으로 삼던 회화의 오래된 관습을 깨뜨린 장면이었다. 그리고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여성에게도 의무교육이 시작되어 여성도 책 읽기가 가능해졌다. 스스로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인간,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주체의 얼굴. 강렬한 파란색 침구와 줄무늬 바지의 리듬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고 있었다.
좌) 위트릴로 우) 르느와르
하지만 발라동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 역시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아이를 낳았다. 생부는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유력하지만 본인은 부인했고 발라동만이 알았을 것이다. 발라동의 오랜 연인이었던 미켈 위트릴로가 어린 모리스를 자신의 성(姓)으로 받아들여 모리스 위트릴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발라동은 아들 위트릴로의 친구와 결혼해 세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복잡한 시간을 보냈다. 세상은 그들을 ‘저주받은 3인’이라 불렀다. 어머니의 선택은 아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결국 위트릴로는 조현병을 앓으며 술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시작한 그림이 그의 삶을 구했다. 몽마르트의 풍경은 그의 화폭에서 빛을 되찾았고, 예술은 그에게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선과 색들이 오히려 그의 생을 지탱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건네는 묵직한 기적이 아닐까.
퐁피두를 나와 몽마르트로 향하는 길, 나는 발라동과 위트릴로가 살았던 집(오늘의 뮤제 몽마르트)를 떠올렸다. 바람은 언덕을 타고 천천히 불어왔고, 햇빛은 계단 사이로 고르게 떨어졌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며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랑하고, 버티고, 결국 스스로를 치유해 냈다. 삶의 무게를 예술로 치유한 사람들이 모여있던 이 언덕에서, 나는 내게도 조용히 되뇌었다. 우리 역시 아직 걸어가는 중이라고. 예술은 그런 우리에게 끝없이 등을 떠미는 또 하나의 손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