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풍경 속으로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오는 사람은 많지만, 뮤제 몽마르트까지 발길을 옮기는 이는 드물다. 십수 년 전 처음 이 언덕에 올랐을 때의 나도 그랬다. 사크레쾨르 앞 광장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화가들로 붐비는 광장, 오래된 골목길을 거닐다 시간을 모두 흘려보냈고, 이곳에 ‘몽마르트’라는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었다.
이번 여정은 화가들의 숨결을 따라 걷는 순례였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지나간 모든 장소를 찾아가고 싶었다. 뮤지엄 정문에는 이 집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이름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었다. 르누아르, 라울 뒤피, 에밀 베르나르, 수잔 발라동, 모리스 위트릴로, 그리고 발라동의 남편이자 아들의 친구였던 앙드레 우터까지. 그 이름들은 한때 이 집에서 서로의 시간이 겹쳐지던 흔적이었고, 언덕을 이루는 빛과 그림자였다.
전시실에는 그들의 그림과 편지, 그리고 몽마르트가 겪어온 세월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오래전부터 숭고함과 가난, 신앙과 예술이 맞물려 이어져온 장소였다. 로마 시대부터 포도를 키웠고, 중세에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세워져 수도사들이 미사를 위해 포도주를 빚었다. 지금은 빠리시에서 그 일부만 남겨 지키고 있으며, 그 포도밭은 미술관 정원 깊숙한 곳과 맞닿아 있었다. 앙상한 가지 너머로 다가올 여름의 넝쿨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릴로가 그린 빠리의 풍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몽마르트 출신인 그는 평생 이 언덕과 도시의 거리를 그렸다. 그의 화면에는 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빛을 머금은 흰 건물의 표면은 두껍고 거칠고, 그림자의 경계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존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이 불러오는 정서를 포착한 것이었다. 상처가 예술로 변해가는 과정이 그의 작품 속에 고요하게 배어 있었고, 그래서인 한 줄기 바람처럼 쓸쓸하게 다가왔다. 에드워드 호퍼의 도시 장면을 떠올리게 했고, 우리나라 원계홍 화백의 거리 풍경과도 닮아 있었다.
꼭대기 층에 오르자, 발라동과 위트릴로가 살던 집과 아틀리에가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창문 아래로는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졌고, 봄의 초록이 정원을 아련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은 언덕을 따라 흘러, 이 집이 남긴 삶의 흔적을 함께 실어 나르는 듯했다.
나는 반 고흐 형제의 숨결을 따라 다시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