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e starter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서 상대의 논리적 헛점을 드러낸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단순히 상대를 말싸움에서 이겨먹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한 방법은 "소피스트"들이 추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승리하기 위한 화법을 혐오한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진리이다. 그런데 진리란 완벽하고 거대한 개념이라서 상대도 모르고, 자신도 모른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가늠이 간다. 공부하는 데 있어 오답노트가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방법을 산파술을 통해 알려주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워낙 많은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지만, 대표적으로 대상에 대한 갈망이 모든 학문의 기원임을 알려주었다. 갈망하는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건, 혹은 평생을 바쳐도 부족함이 없는 진리이든, 그도 아니면 가장 아름다운 무언가라면 그것에 매진하여 일생을 바치는 태도가 중요함을 일깨워준 사람이 플라톤이다. 대상에 대한 갈망은 나에게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따라서 대상에게 있는 것인 "그것"을 욕망하여 생겨난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자 목적이기도 한 "에로스"이다. 철학이 에로스의 학문이라는 것을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을 구분하여 정확한 위치에 놓는 방법을 알려준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런데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성을 가진 동물"이 인간이다. 이렇게 인간이라는 대상을 종차와 유차에 따라 구분하고 그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하여 거대한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러한 카테고리를 전 대상의 범위로 넓혀나가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위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본래 목적을 알게되면, 각자의 위치에 잘 배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세상의 사물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 잘 배열되어 있다면, 형이상학적으로 아름다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목적이다.
데카르트는 "나" 자신을 규정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고대의 시스템이 파괴되자, 새로운 세상의 인간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영원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던 종교의 체계도 믿을 수 없게되자 근대인들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파괴와 살육으로 나아간다. 30년 전쟁의 군인 출신인 데카르트는 모닥불 앞에 앉아 명상한다. 적어도 "나" 자신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파국을 막을 수 있을텐데. 절대로 분할할 수 없는 나 자신이란 무엇일까? 감각은 변한다. 그러므로 의심스럽다. 적어도 감각이 나 자신은 아닐 것이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결과, 그렇다면 의심하고 있는, 생각하고 있는 순간의 나 자신만은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서양철학에서 이야기되는 사유=존재의 진리가 데카르트에서 정확하게 규정된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순간"의 나 자신만은 존재한다는 미약한 결론에 이른다. 이렇게 의심을 통해 나를 규정하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사실 근대철학의 완성자는 칸트라고 보아도 좋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의심한다.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능력인 이성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 잡다한 감각덩어리를 받아 머리 속에서 재구성한다. 머리 속에는 이미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잡다한 덩어리를 배열하여 개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범주가 존재한다. 범주를 가지고 감각에서 파악한 덩어리가 재배열된다. 따라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사물이 "키보드"임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이성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지만, 동시에 나와 외따로 떨어져있는 키보드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머리속에서 재구성되어 나온 키보드는 알 수 있지만, 키보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학문적 체계를 받아들여 위에 나온 모든 방법론을 종합한다. 스피노자의 체계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이다. 세상은 신이자 정신의 다른 모습이다. 정신이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이 세계의 본질이다. 따라서 미약한 개인은 다양한 정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모든 것이 정신의 운동과정임을 깨닫고 마침내 그 운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세계의 시작은 정신이 움직이는 것이었으므로, 최종적으로 미약한 개인이 깨달은 "정신의 운동"또한 애초부터 존재했던 진리를 다시 재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작과 끝은 하나가 된다.
철학과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세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나카모리 아키나의 이번 곡은 "정열"을 불태우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열이 없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내가 세상과 마주하면서 정열을 불태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대상의 마음과 일치하여 "같이 연주하는 멜로디"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같은 마음"은 이미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가 말한 바 있다. 또한 대상을 알고 싶어서 "애달픈 판타지"를 가져야만 한다. 대상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감정은 "판타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게 상대를 알고 싶어 갈구하는 나의 마음은 "헝그리 엔젤"과 같을 것이다. 인간 존재는 평소에 충만하게 살아가다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텅 비어있다는 느낌에 이르게 된다.
완벽한 존재를 바라보면 그 앞에서 내가 미약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주체는 숭고한 것을 바라본 상태이며, "헝그리 엔젤"의 상태이다. 이러한 형상에 이르렀다면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처럼 진리의 요소를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아직 그 진리를 깨닫고 있지 못할 뿐이다. 철학은 공부의 방법으로, 예술은 대상에 대한 관찰과 영감, 공감의 방법으로 그 진리를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