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몰락, 68혁명, 생톰

아버지라는 상징계가 저하되고 나타나는 것은 증상의 시대

by ou pire
Jacques-Alain_Miller.jpg 자크 알랭 밀레
"상징질서의 편향은 정신분석의 격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변화가 도처에서 지적되고 있지요. 오늘날에는 가족 또한 다른 관념이 생겨났고, 다른 실천으로 다른 개념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아버지의 기능은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시작된 것이지요. 혁명의 때, 우리들이 왕의 목을 친다고 하는 그런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업혁명은 다른 굴절점이었던 겁니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계기였으며, 이러한 효과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뛰어나게 서술한 바 있습니다. 확실하게 안정되어 있던 것을 지워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아버지는 어느새 사회적 명성의 보유자로서도, 왕년의 입법자로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촉진된 조건의 평등이라는 개념과 같이 고대 로마에서 유래한 가부장제가 쇠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발자크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19세기의 시점에서 저하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자크 알랭 밀레, 2013 – 향락사회론, 마츠모토 타쿠야 지음, 人文書院. 16~17쪽에서 인용된 것을 재인용. 번역은 글쓴이의 것.)




1.


자크 알랭 밀레는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의 수제자이자 사위로, 현재 라캉학파 정신분석계를 이끌고 있는 분석가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지도교수이기도 하지요. 밀레는 라캉의 이론을 현대사회에 맞게 재해석하는 인물인데요. 그가 2013년에 했던 이야기를 보면 "아버지라는 상징계의 몰락"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몰락. 동시에 권위의 추락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저하되고 권위, 위력이 추락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국가의 권위가 떨어지고 개인의 권리가 증진되고 있다는 점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요.


순풍산부인과.jpg 출처 : SBS홈페이지

얼마 전 TV를 돌려보다가 “순풍산부인과(1998~2000)”를 재방송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재미있었습니다. 다시 보니, 어렸을 때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보였습니다.


순풍산부인과의 원장인 오지명은 가부장적인 인물입니다. 가족들에게 화를 내고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꼬장을 부리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로서 권위를 마음껏 뽐내는 인물이죠. 이 시트콤에서 웃음요소는 이런 부분에서 나옵니다.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던 가부장적 인물이 허당의 모습을 보이는 점. 손녀와 손녀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즐겁게 노는 모습 등에서 소박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죠. 가부장적 이미지와 반대되는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에서 웃음이 나옵니다. 권위의식이 가득한 인물의 내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순풍산부인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박영규죠.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장인어른에게 얹혀살면서 주변 인물들에게 얻어먹는 캐릭터. 동시에 아내와 딸에게는 큰소리도 치지만 때로는 다정하기도 한 입체적인 캐릭터입니다.


이 시트콤의 방영기간을 잘 살펴보세요. 1997년 IMF사태 다음 해부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에서 유추해볼 때, 순풍산부인과는 가부장적 권위가 어느 정도는 살아있으면서도 그것이 무너져가고 있는 “전환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박영규의 모습은 우리에게 웃음도 주지만 동시에 씁쓸함을 느끼게도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몰락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권위를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이것을 방영 당시에는 몰랐다가(그때는 제가 어렸던 탓도 있겠지요) 다시 보니 놀랄만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의 권위가 "웃음포인트"가 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합니다.


헤겔.jpg 헤겔, 출처 : 한겨레


여기서 잠시 철학자의 견해를 들어보죠.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한 사람만이 자유로웠던 왕권제로부터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자유주의를 향해 진보합니다. 이러한 역사발전의 과정은 나이, 신분, 빈부격차를 뛰어넘어 상대방이 틀렸을 때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의사표현의 자유로부터 도출됩니다. 우리 모두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대화와 합의를 통해 진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낙관론적 이념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역사의 발전이 자유를 향해 진보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 역사를 살아가는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2.


IMF.jpg 출처 : KBS홈페이지

확실히 IMF사태를 기점으로 아버지의 권위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왕의 위력과 다름없었던 대통령에 대한 관점도,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점점 직업인의 하나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나죠.


아버지의 권위가 몰락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국가의 권위,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권위, 일상생활의 변화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jpg 고독한 미식가, 출처 : SBS뉴스 홈페이지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를 보세요. 이노가시라 고로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고 오로지 먹을 것에 대해서만 욕망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로서의 권위나, “직장상사”로서의 권위가 없습니다. 그는 그 어떤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그저 배고픈 아저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진 시대에는 그저 배고픈 아저씨, 먹고 살아가려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소시민의 삶,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캐릭터들이 인기를 끕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것은, 수직적 질서로부터 수평적 질서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개인의 욕망이 아버지로부터 인정욕구와 연결되어 있던 시대는 끝나고, 이제 개인의 욕망은 자기 자신의 승인만을 필요로 하게 되었죠.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적극적 태도는 1968년의 혁명으로부터 기원한 것입니다. 동시에 부권의 추락, 부권 기능의 저하가 본격화된 것 또한 1968년의 혁명이 기점이었습니다. 68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이 정신적 운동의 모토는 “자유”였습니다. 가부장적 권위를 해체하고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자는 것이었죠.


이런 운동의 결과, 신자유주의와 신좌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는 꼭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폭력적 경제주권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즉 경제질서에 있어서 자유의 원리를 최대한 도입하자는 것으로 대기업이나 재벌을 옹호하는 이론체계가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된 신자유주의라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쿠폰을 도입하여 빈부격차 해소에도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니까요.


이처럼 자유의 증진은 동시에 가부장제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애초부터 자유란 ~로부터의 자유를 지칭하는 것으로, 가부장제나 아버지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권기능의 저하로 인해 모든 권위가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일왕의 이미지가 권위나 국가의 대표자에서 “귀여운 왕”의 이미지로 전환된 것이 그 사례지요. 가와이이 제국 일본이라는 책에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권위의 추락은 귀여운 남성이나 친숙한 남성, 또는 소박한 소시민의 이미지로 대체됩니다. 권위주의는 필연적으로 비밀이나 신비주의와 이어지는데요. 신비주의의 세계가 끝나고 드러나는 것은 솔직하고 소박한 소시민의 캐릭터이지요.


짱구.png


이런 소시민의 캐릭터를 과거부터 구축해온 작품이 “짱구는 못말려(크레용 신짱, 1990~)”입니다. 짱구는 못말려에서 비밀은 없습니다. 짱구 일가의 일상이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모두 공개됩니다. 또한 어른인 짱구 아빠와 엄마는 애초부터 소시민적인 캐릭터성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캐릭터죠. 타임세일 시간에 맞춰서 어떻게든 싸게 식료품을 사기 위해 고민하는 짱구 엄마나, 용돈이 떨어져서 저렴한 점심메뉴를 찾아 돌아다니는 짱구 아빠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소박함, 솔직함이 이 작품을 오랫동안 장수하게끔 했습니다. 이 작품이 아직까지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게 시대를 앞서 소박한 캐릭터성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아버지의 권위, 상징이 추락하면 사람들의 내면은 어떻게 바뀌는 걸까요? 정신분석적으로는 아버지의 몰락은 다음과 같은 대체물을 필요로 합니다. 라캉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내가 최초에 생톰이라 정의한 것은, 매듭이 실패함에 따라 풀려버린 상징계, 상상계, 실재를 다시 붙들어 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이것이 조이스에게 일어난 사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이스의 증상의 발단은 그에게 ‘아버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조이스라는) 고유명을 둘러싼 일체의 것들에 초점을 맞추었고 (중략) 그가 자신의 명성을 욕망함에 따라 부성의 결여를 보충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조이스의 예술은 특수하기 때문에 생톰이라는 용어가 멋지게 맞아 떨어집니다.”

라캉, 세미나23(생톰), 라캉, 환자와의 대화, 고바야시 요시키 엮음, 이정민 옮김, 에디투스.에서 인용된 것을 재인용


아버지의 권위(아버지라는 상징)가 추락하면 개인의 심리에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마음을, 신체를 규율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상징 혹은 권위가 사라지면 마음과 신체가 느슨해져버려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느슨해진 마음과 신체를 다시 단단하게 조이는 것이 “생톰”입니다. 증상이라는 뜻을 가진, 라캉의 신조어입니다. 심리에 문제가 생기면 증상이 생길텐데, 다시 그 증상으로 심리를 규율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겁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개인은 증상을 통해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회입니다. 이 증상이란 과거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발작이나 공황, 정신적 우울과 같은 증상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게끔 하는 증상입니다.


라캉이 분석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보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이죠. 소설의 스토리가 있는지가 의문일뿐더러, 소설의 문체조차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내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혹은 조이스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소설 그 자체가 “증상”인 것입니다. 조이스는 소설이라는 증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살렸던 셈이죠.

walling-52H5Nfi5WiE-unsplash.jpg 스마트폰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생톰이다.


이런 특이한 증상을 넘어, 21세기의 생톰은 더욱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중독과 같은 행위도 생톰입니다. 느슨해진 몸과 신체를 다시 조이기 위해서 외부의 기계인 스마트폰에 “중독”증상을 보이는 겁니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중독의 시대입니다. 상징이 무너지자 느슨해진 몸과 신체를 다시 규율하기 위해 외부의 것을 필요로 하는 증상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증상은 구독과 좋아요, 정보공유로 사람들 사이에 전파됩니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위해 다른 마음과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생톰을 통해서 증상은 완화되고 중독은 강화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사회의 본질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생톰의 시대. 중독의 시대가 왔습니다.




2021-10-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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