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와 자아

확장하는 네트워크/축소하는 자아

by ou pire

인용도서 : 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이희재 옮김, 민음사. 2001년


스마트폰.jpg Unsplash



1.


어디를 가든 주위를 둘러보면 스마트폰에 접속해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조차도 그 대열에 둘러싸여 같이 스마트폰에 열중하곤 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멀뚱히 서있으면 뻘쭘하기도 할 뿐더러, 길가에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스마트폰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하면서도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척, 주위를 둘러보면 주위의 환경과 단절된 채 디스플레이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90%는 되는 것 같다. 이처럼 변해버린 세상이 신기하고 어떤 때는 놀랍기도 하다.


스마트폰은 인터넷과 접속하기 편리한 도구이므로, 아침에 일어나 기상알람을 끄고 인터넷 뉴스를 보거나 혹은 미국 주식창을 확인하거나 그도 아니면 오늘의 특가상품을 확인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네트워크에 접속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상을 영위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책을 찾아봤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켜서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온갖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스마트폰의 만보기를 통해서 내가 걷고 있는 거리와 소모한 칼로리를 확인하고,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워치를 통해 나의 심장박동수가 제대로 뛰고있는지 체크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마트기기를 통해 두뇌를 확장시키고 더 나아가 신체를 확장시키며 살아간다. 우리시대의 인간은 스마트기기를 제2의 신체로 삼아 본래의 신체를 확장시키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자신의 신체를 무한하게 확장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터이고, 이처럼 신체가 연약해질수록 네트워크에 분산되어 있는 정보량은 강화된다. 우리 신체의 강건함이나 육체의 신비를 추구하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드러나는 현상만 보면 스마트기기의 사용은 신체의 약화를 불러온다. 정확히는 두뇌의 의존성을 높인다고 할까.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나 그도 아니면 이동수단을 타고 움직일 때조차 네트워크에 접속해있으니 거기에 짤막한 글이라도 하나 남긴다고 치면 정보량의 강화는 어마어마한 총량의 증가를 불러올테고, 그럴수록 네트워크의 효과는 배가된다. 그에 반해서 두뇌는 기억정보의 왜곡이나 혹은 저하를 불러올테고, 신체는 스마트기기에 의존하지 않으면 감각이 둔해지는 지경으로까지 떨어질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신체를 갈궈서 자신을 증식하는 네트워크의 속성은 이제 스마트폰보다 더 작은 강화도구들로 바뀔지 모른다. 구글이나 애플에서 추진하는 글라스라든가, 이미 나와있는 스마트워치... 이제 생명의 박동감조차 기계적 신호로 전환되어 정보로 치환되거니와, 역시 네트워크는 자신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신체를 갈궈대고 있다.


스마트폰에 접속해있는 시간이 개인에 따라 증가하면 할수록 활자를 물리적 도구에 담아 체계적으로 정련한 책의 가치는 저하되고 말 것이다. 지식의 체계적 정렬인 책이나 그도 아니면 인쇄물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정보를 얻었던 인간이 불과 10여 년 만에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자신의 신체를 갈굼당하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이건 스마트폰을 판매하여 먹고사는 나라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라는 체념의 감정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이러한 접속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합리적 예측은 이미 2001년에 제레미 리프킨이 말한 바 있다.

(소유의 종말, 이희재 옮김, 민음사. 이 글의 모든 인용은 이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람은 미래학자로 소개되지만 그보다도 주제에 맞는 무수히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독자에게 제시해주는 사람인만큼 그런 예언가의 성격과는 다르다.


어쨌든 그가 예측한 바에 의하면 우리가 접하게 될 근미래사회는 확실히 접속의 시대가 주류를 이룰 것이며, 그 접속은 기업이 “사람의 생활 전체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점점 더 떠맡게” 되는 사회로의 변모를 이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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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령 우리가 즐겨하는 관광을 살펴보자. 관광객이라는 용어는 원래 “19세기 초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 견문을 넓히기 위해 3년 동안 유럽을 유람하던 영국의 젊은 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근대산업혁명의 성과로 나타난 철도의 증설로 인해서 사람들이 안식일마다 관광을 즐기게 됐다. 이러한 관광을 구매자에게 친숙하고 편리한 방식을 통해서 상품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1850년대의 사업가 토머스 쿡이다. 그는 여행을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문화적 가치를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으로 바꾼다.


토머스 쿡은 인간들의 체험을 상품화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그는 “판매자-구매자 관계를 ... 서버-클라이언트 관계로 탈바꿈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그래서 여행과 관광을 상이한 판매자와 구매자의 독립된 시장 거래들로 구분하는 방식을 과감히 제거하고 포괄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고객으로부터 한꺼번에 돈을 받으며 고객과의 1대 1 관계에 바탕을 둔 서비스 시대를 열었다. 미리 정해놓은 요금을 한꺼번에 받고 쿡은 교통, 식사, 숙소, 관광, 환전에 이르기까지 고객이 원하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했다.”


토머스 쿡은 요즘 말로 하면 플랫폼을 만든 것이다. 배낭여행처럼 개별적으로 여행을 가면 숙소나 식당이나 문화유산에서나 모두 개인이 알아서 구매자를 만나 결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관광상품을 통하면 단 한 번의 결제로 모든 서비스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사이트에 접속하면 쇼핑이나 공공문서 제출, 음악감상, 영화감상, 독서 등등 모든 생활 자체를 한큐에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플랫폼은 서버를 바탕으로 운영되거니와,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필요할 때 서버에 접속하여 결제하고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토머스 쿡으로부터 나왔다.


흔히들 관광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관광자원이란 대부분 문화유산이나 혹은 여가시설을 일컫는데, 전통적으로 문화유산이나 여가는 상품이 아닌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둘은 범주가 달랐다. 따라서 문화적 가치를 상품으로 전환시키려면, 거기에 적절한 요소의 스토리를 포함시켜야 한다. 문화유산과 문화유산 사이로 움직일 수 있는 교통, 그 교통으로 이동하는 동안 시간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역사적 설명의 제공, 지역의 특색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 식사,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코스로 설정하는 관광이라는 개념의 발전, 거기다 그 나라에서 통용될 수 있는 화폐로의 전환 등등. 토머스 쿡이 봤을 때, 이 모든 것들은 돈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획기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각지에 흩어져있는 서비스 자원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정렬하여 관리하는 서버가 필요했고, 그 서버에 접속하여 문화적 열망이 충족되기를 갈구하는 클라이언트가 필요했다. 견문을 넓히려는 관광의 본래 목적이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관계로 전환되면서 상품이 된 것이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받아서 면세점이니 명동거리니 엄청난 활황을 맞았었으니, 이러한 산업의 부흥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관광객이 뿌리고 가는 돈 중에서 현지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관광산업은 지역사회와 나라에 돈과 일자리를 안겨주지만 여러 가지 통계를 보면 실제로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 만지는 돈은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 대부분의 호텔, 항공사, 휴양 클럽, 관광회사, 식당 체인은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산업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자본은 대부분 거대기업들의 손아귀로 들어가며, 그 기업들은 국가의 위신을 드높인다며 뽐내고 다닌다.

국가의 위신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네트워크망 어디에나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이런 시대에 그딴게 뭐란 말인가? 그러한 개념은 민족개념의 탄생과 함께 적의 개념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국가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공동체일 뿐이다. 이건 법인보다도 못한 어떤 허울뿐인 커뮤니티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 커뮤니티는 우리의 실생활에 연결되어 공짜 쿠폰이라도 제공하니 그나마 낫다. 국가의 위신을 드높였다고 뽐내고 다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에 충실하게 복종하여 그 명예를 드높였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니 그렇게 엄청난 일이 아니다.(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참조)


논의가 조금은 세어나갔지만, 접속의 시대가 옴으로써 우리가 걱정해야 할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시대변환은 기술의 변화만큼이나 내면의 변화를 불러왔으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도 바로 인간의 내면일 것이다. 접속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화하여 자신의 신체를 네트워크 공간으로 확장시키고, 유연한 두뇌를 네트워크에 걸맞은 접속형으로 전환시킨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간대에 살아가지만 동시에 미래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본래적 신체를 스마트기기를 통해 확장시킴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네트워크와 접속하며 하루를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래인들은 “7초 안에 할 말을 모두 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정보에 즉각 접속하여 인출하는 데 익숙하고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며 성찰적이기보다는 찰나적이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기자라고 생각하고 근면하다는 말보다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해한다. ... 부모세대처럼 단단히 뿌리박은 삶보다는 아주 유연하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념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글자보다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쪽이다. 작문 실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전자 데이터를 처리하는 실력은 한 수 위다. 분석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 소비자 주권 운동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믿는다.”


위의 내용들이 전부 다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나의 경우에도 얼추 몇 개는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제레미 리프킨의 이런 통찰은 2001년에 이루어진 것이니 이 사람이 단순한 미래학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3.


네트워크 공간이 무한하게 확장하는 무언가라면 확장하는 것과 동시에 축소하는 것이 있어야 우주의 원리에 부합할 것이다. 축소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 그 자체다.



런던.jpg 부르주아의 욕망이 탁월하게 표현된 도시, 런던 / Unsplash


먼저 소유의 시대를 열어낸 부르주아의 내면은 어떠했는가? 부르주아는 최초로 독립된 개인공간을 발명했으며, 프라이버시의 존중을 말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생활방식의 모든 것은 사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되었으며 고전시대의 광장(아고라)이나 교회와 같은 공공장소의 가치는 현격히 저하되었다. 부르주아는 재산의 형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사적인 것을 만들고 프라이버시를 지켜내는 공간을 소유하기를 열망한다. 개인소유의 자가에 대한 열망, 자아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다. 이것들은 부르주아의 이념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부르주아는 인간의 내면을 바꾸어놓는다. “서양역사에서 자아라는 개념은 오래전부터 서서히 발전해 왔지만 유독 부르주아는 이 자아에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집에는 어디를 가나 거울이 달려 있었다. 자기 점검과 자기 반성은 취미이면서 동시에 집착으로 자리잡았다. 자기확신, 자기애, 자기연민, 자긍, 자중, 인격, 에고, 양심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담론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자화상과 전기는 인기 있는 문화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소유의 시대에서 체험의 시대로, 접속의 시대로 이행한 우리시대는 또다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목도하고 있다. 소유의 시대는 도시화의 시대였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정보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구축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자 민족국가 단위 중심으로 국민을 하나로 창출해낼 수 있는 기제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인쇄기술의 발전과 함께 동반된 국민문학이다. 저 멀리 유럽에서부터 살펴보자. 잉글랜드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 독일의 괴테,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중국의 경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미국의 마크 트웨인, 러시아의 톨스토이... 이런 국민문학은 모두 도시 네트워크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이다. 민족국가의 고유어인 국어로 집필되어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정체성을 드러내는 국민문학의 발전을 통해서 국민국가 체제는 공고해졌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가들은 자본의 순환을 더 빠르게 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였다. 이에 도시의 네트워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수단인 인터넷을 이용하여 가상공간에서도 자본을 순환시키자고 제안한다. 이제 공간은 필요 없다.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에나 접속을 통해 실시간으로 자본을 유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 세대를 지배하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광고판.jpg 접속의 시대에는 광고를 보는 것이 정보의 대가이다. Unsplash


우리가 접속할 때마다 노출되는 광고를 생각해보자. 스마트기기에서 끊임없이 오는 알림들. 그 알림들은 이곳에 접속하여 버튼을 클릭하면 돈을 벌 수 있다던가, 원하던 상품을 싸게 살 수 있는 시간이 도래했다던가, 쿠폰의 사용기간이 임박했으니 당장 쇼핑버튼을 누르세요!와 같은 자본의 순환과정에 대한 알림이다. 이 알림은 무수한 정보의 순환을 상징하거니와, 이제 인간이 혼자서 고독하게 자신을 회고하며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어느 때나 스마트기기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혼자가 아니라 감시당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오래된 관념은 복수複數의 관계라는 새로운 관념에 밀려나고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뚜렷한 경계선은 더욱 희미해진다.”


과거의 이야기는 거대한 것을 추구하였다. 기업의 목표는 거대한 사업을 소유하여 그것을 가꾸어나가고 이를 통해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된 환경에 발맞추어 이제 기업은 프로젝트 단위로 팀을 편성한다. 팀은 고정적인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팀원에게 접속하여 커뮤니케이션하면 된다. 정규직 고용이 줄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미 수십 년간의 정규직 고용의 역사가 반복되어 온 결과, 탁월한 업무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본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기위해 필요한 때에만 노동력에 접속하는 팀 단위 프로젝트를 늘린다. 프로젝트의 성과가 나쁘면 다음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없기 때문에, 일시적 접속자에 불과한 노동자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 자본은 비용을 아끼고 최대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우리시대는 고정된 사람들과 만나서 소통하기보다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시시각각 다른 사람을 만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빈도가 늘어난 시대이기 때문에, 고정된 자아를 가지고서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접속의 시대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연극성이다.” 이 연극은 예술적 가치나 문화적 가치의 추구가 아니라 상업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생활의 태도를 즐기는 자로 바꾸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젊은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미완의 예술품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문화 산업은 새로운 의식을 창조하고 활용한다. 그 점에서 닐 개블러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살고 일하고 쇼핑하고 노는 공간을 설계하고 건설하고 장식하고, 우리의 의상을 창조하고, 우리의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고 얼굴을 훤하게 만들고, 우리의 몸을 날씬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소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주 업무로 삼는 영역의 비중이 미국 경제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아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며, 연기해야 한다. 때로는 착한 사람을, 때로는 악한 이를, 그도 아니면 자기 자신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버거움이 찾아온다. 확실한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나는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고 위태롭게 웃고 있는 나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항상 찾아오고 그것은 우울의 형태로 나타난다. 지난해에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사실 기분+장애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지만 의학의 관례상 그대로 쓰기로 한다)를 앓는 사람의 수가 100만을 넘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를 신종 코로나의 영향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보다는 전염병이라는 사태를 통해 더욱더 비대해진 네트워크와 그로 인한 자아의 축소 현상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듯하다.


우리가 더 많이 접속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약해진다. 신체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그렇다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guus-baggermans-oWsy_TQAScI-unsplash.jpg 일본은 진보가 멈추었기 때문에 오히려 소박한 마을이 유지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하고 있다. Unsplash



4.


자본의 정교한 은폐작용 이전에 존재했던 것은 소박하지만 순수한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런데 무한한 자기증식이 목표인 자본은 그 순수한 삶에 지겨움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벗어던져야만 할 것으로 규정한다. 혼자서 여유있게 샤워하고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 그보다 좋은 것은 카페에 앉아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돈이 작동하는 법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카페에 갈 수 없다면 SNS를 이용해보렴. 그곳에는 네가 바라고 원하는 사람들의 고풍스러운 삶이 존재한단다... 이러한 자본의 교묘한 매혹은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증진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는 불러왔지만 관심사를 단 하나로 통일하여 개별자의 욕망은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상한 일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늘어가고 있다. 확실히 네트워크의 비대화로 인해서, 어디에서나 시시각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분노와 증오는 배가되고, 탐욕과 공포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없어지는 것일까? 바로 우리 사회가 공감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신뢰는 공감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공감은 ‘타자의 인간성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을 요구한다. 공감은 가장 심오한 인간의 감정에 해당된다. 친밀함과 예의바름을 하나로 이어주는 힘도 공감에서 나온다. ... 남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런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때 길러진다. 다른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인문학이 그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하나로 꼽아보라면 바로 공감의 능력일 것이다. 사실 우리시대에, 사람들이 공감능력을 잃어간다고 느낀 적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조롱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요새는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끼리도 서로에 대해 공감하지 않은 채 오로지 상대의 고통은 나의 행복이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이니 이 시대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한탄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인문학의 저하현상과도 연결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네트워크의 발달과 그로 인한 접속문화의 융성과 큰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인문학이야 어차피 이 나라에서 단 한 번도 부흥했던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공감의 능력을 다시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감의 능력을 통해 창출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는 신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이 계약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없으면 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저 사람이 나에게 진실을 말할 것이라는 신뢰가 없으면 터놓고 내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이처럼 공감능력의 상실은 신뢰의 상실을 불러왔거니와, 더 나아가 사회의 해체까지 동반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다시금 결속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결속의 장치들이 작동했던 때의 훌륭한 것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어지는 글의 순서는 음악예술에 있어서 자기확신의 사례, 영상예술에 있어서 시대를 탁월하게 드러내는 사례, 마지막으로 인문학에서 제시하는 돌파의 방법들을 검토해본다. 사회를 다시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작동하고 있는 사회의 정교한 구조에 구멍을 뚫고, 그 간극을 돌파해야만 한다. 그 돌파의 방법은 무엇으로 지칭하기 어렵지만, 예로부터 죽음의 이념이나, 공백에 대한 추구, 최근에는 탈합치라고 표현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소박한 것들에 대해서 살펴볼 계획이다.





2021-10-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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