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춤(1)

분명 사치스러운 고민이지만 그래도

by ou pire


1.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의 desire는 지겹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돈이 넘쳐나고 놀거리도 넘쳐나고 사랑도 넘쳐나지만 그래도 지겹다. 사실 인생은 지겨운 일의 반복이다. 깨어나면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나서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이란 주제는 히트곡에서 흔히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은 거품경제 시절(1980년대), 더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번영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만 하면 미국도 뛰어넘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아무도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절의 히트곡이 지겹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이상하다.


아마도 desire(정열)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일 것이다. 번영을 누리고 있는 일본이 잃어버린 것은 정열이다. 에도시대의 반복인 일본은 외적으로도 지겨운 사회이지만, 더욱더 주체를 지겹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정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진짜로 미국을 뛰어넘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을 뛰어넘으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가? 당대의 일본 정치와 경제는 이미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리시마 미치오는 파레토로부터 빌려와 인간의 기본 요소를 다음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1)새로운 '조합'을 찾아내려는 의욕

2)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하려는 성향

3)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행동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는 경향

4)사교성의 경향

5)자신과 자기 재산을 보전하려고 하는 경향

6)섹스, 즉 종족의 보존 욕구

모리시마 미치오,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 장달중 외 옮김, 일조각 70~71쪽


제국주의 일본의 의사결정을 도맡은 집단은 육군이었다. 일본 육군은 2번의 성향,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일본 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군을 통해서 농민들은 군인으로 변했고, 군대의 시간(병영생활의 시간), 군대의 일상언어(군대 언어), 군대의 제식에 맞추어 자신의 신체를 변환하였다.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곧 온 몸으로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대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강해지고, 사람들의 의식과 신체에 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정치와 경제의 의사결정권이 군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2번의 성향, 전체를 우선시하려는 성향이 강해졌다.(요시다 유타카, 일본의 군대, 최혜주 옮김, 논형)


이에 따라 일본에는 혁신이 사라진다. 혁신이란 1번의 성향, 새로운 조합을 찾아내려는 정열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일본의 정치와 경제는 2번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따라서 정열을 가지고 새로운 조합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에서 배제돼고, 혁신이 사라진 체제가 되었다.

혁신이란 새로운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다. 혁신이란 서로 다른 A와 B가 결합하여 새로운 C가 탄생하는 것을 뜻한다. 소주와 레몬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를 결합시켜 레몬소주라는 새로운 상품이 나오는 것을 보면 혁신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형식의 산물이 탄생하는 것을 혁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혁신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 즉 대상에 대한 정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혁신이 없으면 인간의 삶은 지겨울 수밖에 없다. 기업이나 국가나 혹은 삶에 있어서나 혁신이 없으면, 즉 정열이 없으면 지겨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춤을 추어도, 재미있게 즐기는 것처럼 보여도, 지루함은 변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desire는 그런 일본의 당대 풍경을 가사와 무대의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거품경제 시절의 일본인들은 행복해보여도 그 이면에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정열이며, 갈구하는 대상에 대한 몰입일 것이다. 정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정의나 자유나 사랑이 사라져버렸고 일본의 역사는 그 시절을 기점으로 완전히 끝났다. 나카모리 아키나의 desire는 그런 점을 포착해서 정열을 되찾으라고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열을 찾지 못했다.



2.

Crimson(1986)은 나카모리 아키나의 앨범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 진홍색이라는 제목처럼, 욕망의 주체를 주인공으로 분석과정을 다루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앨범을 각 노래의 특정 단어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일단 첫 곡 "MIND GAME"의 가사에는 당신의 꿈을 알고 싶다는 가사가 나온다. 정신분석에서 꿈은 주체의 순수한 욕망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그곳은 실재가 드러나는 곳으로, 순수한 욕망이 다양한 형태를 통해 제시되는 곳이다. 정신분석가인 라캉에게 실재란 최초의 충동과 연결된 주이상스(향락)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주이상스는 큰사물(최초의 충동의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불쾌 속의 쾌락이다. 분석에서 큰사물, 즉 최초의 충동은 억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충동은 사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충동이기 때문이다. 이 충동이 어떤 방식으로 억압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성격이 결정된다.


하지만 최초의 충동은 동시에 최초의 만족을 주었던 순간이다. 그러한 만족의 기억을 반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큰사물에 다가가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욕망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이 과정은 진리를 인식하는 순간과도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 의하면, 인간은 수난 끝에 진리를 깨닫는다. 이러한 진리의 순간이 주이상스의 순간이다. 따라서 개인의 주이상스가 어떤 방식으로 만족을 주느냐가 분석에서 주요한 과제가 된다. 사람마다 만족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신인神人인 예수의 주이상스를 표현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진리의 순간, 신의 강림을 깨닫는 예수는 죽어가며 미소를 짓는다. 이 미소가 표현된 라스트신은 신의 주이상스, 향락을 표현한 것이므로 금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카잔차키스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애초에 라캉은 무의식을 언어적인 차원과 연결했었다. 무의식은 언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의식의 전회가 이루어지고 무의식은 간극이 된다. 언어적 구조 사이로 열린 틈, 구멍으로부터 무의식, 즉 실재가 출현한다는 입장이 된다. 실재의 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충동이며,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향락이다.


꿈은 그러한 간극이 열리는 장소이다. 타인의 본모습 그 자체가 드러나는 장소인 꿈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가감없이 드러난 위험한 존재인 너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즉 네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주체가 이 노래의 주인공이다.


충동의 장소를 알고 싶다는 것은 타자를 남김없이 알고 싶다는 뜻이라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상대를 이해했다고 여기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관계가 끝장나고 말 것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언제나 중간에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환상은 거짓이지만, 거짓이 없다면 관계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과정 모두가 환상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한 환상은 현실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지므로 꿈과 다른 것이다. 꿈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지만 억압되어 다른 방식으로 욕망했던 것들이 파편화되어 드러난다.


그래서 꿈을 안다는 것은 주체에게 위협이고 고통이다. 따라서 꿈을 알고 싶다는 가사가 "MIND GAME"이라는 노래에서 나온다는 뜻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타자를 향락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향락은 고통 속의 쾌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앨범의 제목이 Crimson인 것이다. 고정관념을 구성하는 상징계로부터 벗어나 진홍색, 핏빛으로 물들여질 정도로 타자에게 몰입되어있는 정열의 주체가 이 앨범의 주인공이다. 타자에 대한 몰입은 일종의 광기의 상태이다.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내가 타자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은 미친 상태다. 따라서 사랑의 상태는 일종의 미친 상태이다.


다음 곡인 "역(Eki)"에서는 우연히 만난 옛 애인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대중가요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인과 이별한 후 2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 머리카락(카미, 髮)이 바뀌었다는 가사가 나온다.


카미(髮)는 일본어에서 카미(神)와 발음이 똑같다. 기독교에서 카미(神)를 어느 정도 이해하면 머리에 손을 올리고 세례를 받는다. 카미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음이 선포되는 상징적 의례인 것이다.


일본에서 카미는 초월적인 신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있는 무언가를 지칭할 때도 사용한다. 절대자의 의미만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나 정신을 가리킬 때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미(神)가 바뀌었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카미(髮, 머리카락)가 바뀌었다는 뜻과 함께, 내 마음, 정신이 바뀌어서 더 이상 타자를 예전 그대로 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리상태가 바뀌면 그러한 것을 주관하는 정신의 반영인 자기의 신체를 통제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자른다거나, 네일아트를 한다거나, 혹은 타투를 한다.


타투는 자기의 몸에 기표(언어나 기호의 형식)를 새겨넣음으로써 신체를 다스리는 탁월한 방식 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신체는 원래 제멋대로인 것이다.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진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새겨서 다스려야 한다.


타투를 몸에 침입시킴으로써 진정시키는 효과, 더 나아가 자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타투의 힘이며, 상징계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투입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타투에 대해서는 라캉과 그의 수제자인 자크 알랭 밀레가 이야기한 바 있다. 아버지의 이름이 무너진 사회, 가부장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보편적인 은유를 자기의 힘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 즉 대리표상할 수 있는 기표를 몸에 새겨 넣어서 자기의 신체를 통제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투는 인터넷 문화의 대중화 때문에, 혹은 자기를 표현하는 세대의 출현과 같은 일 때문에 유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에 타투가 대중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저히 통제할 수 없고 끊임없이 떨리는 자기의 신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언어덩어리, 상징의 뭉치인 기표를 새겨 넣는 것이다. (백상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마츠모토 타쿠야, 향락사회론, 참조.)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8년에 "타투"라는 노래를 내기도 했다. 그 노래의 가사에 “空白い胸に”, 공백의 가슴에 ... 타투를 새겨달라는 가사가 나온다.


자기의 신체가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이다. 주체는 원래 아무 것도 아닌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라서, 공백이며 없는 존재이다. 바람이 들어가지 않은 풍선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상태에서, 바람을 불어넣으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풍선과 같은 것이다. 외부의 호흡과 같은 언어의 개입이 없으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껍데기에 불과한 주체는 아무 것도 없는 공백의 존재이다. 따라서 없는 것이 있는 것인 신체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 공백을 다시 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새겨넣어야 한다. 기표를 입력해야 한다. 풍선에 호흡을 불어넣어 형태를 만들듯이, 무언가를 새겨넣어야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야 다시금 무언가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를 몸에 새기거나, 쓰는 것이다. 공백이라는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를 하는 주체는 무언가를 쓰는 주체이다.


이처럼 인간의 최대 문제는 정신적 존재이지만 신체라는 물질적 요소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한 존재에 같이 들어있다. 신이 껍데기를 쓰고 살아간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최대로 자유로운 존재가 그 본성이 억압된 채로 벗어날 수 없는 껍데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는 평생을 살아가며 억제되고, 다스리고, 진정시켜야 하는, 어떻게 보면 끔찍하지만 사랑스러운 것이다.


신체는 이러한 애증의 대상, 따라서 향락의 장소이다. 신체를 통해, 오감을 통해서 정신이 향락할 수 있다.



3.


"oh no, oh yes!"에서는 연속되는 같은 발음의 가사가 나온다. 이것은 반복되는 언어의 발음을 통해 하나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oh no, oh yes"라는 제목의 노래는 하나씩 꺼져가는 “오피스”의 불빛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oh no, 그러한 타자와의 관계는 불륜이기 때문에 이어지면 안 되는 금기이지만, oh yes, 그래도 그러한 관계를 통해 나는 환상을 구축할 수 있다. 이어지는 오피스(office)는 oh peace와 똑같은 발음을 가진다.


즉 oh peace는 금기를 통해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의 제시이다. 사회로부터 배제된 관계를 통해 주체가 안식을 찾을 수 있다는 환상이 드러난다. 지겨운 세계로부터 도망가서 상징적 질서로부터 배제된 관계를 추구하면, 본래의 자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한 욕망이 출현한다. no로부터 시작된 감정은 peace로 이어진다.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거기로부터 순수한 욕망이 출현할 수 있다는 말장난이 등장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언어의 주고받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장난이나 말실수 등에 주목한다. no, yes, peace로 이어지는 발음의 관계는 중요하다. 일본의 팍팍한 고정관념에 구멍을 뚫어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이 시절 앨범의 특징이다.


그 다음 곡인 "엑조티카(Exotica)"는 단어 뜻 그대로 이국적인 것을 뜻하며, 낯선 것을 뜻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반복되겠지만 인간이 반성을 시작하는 때는 자기의 낯선 모습을 파악했을 때이다. 살아가면서 변하는 나 자신을 자각했을 때, 내가 원했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성장한 나 자신을 보았을 때, 이국적인 것, 낯선 것을 느끼고 반성을 시작한다.


이러한 낯선 모습을 자기와 타자에게서 모두 느낀 음악의 주체는 그것을 마음의 바다라는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낯선 것을 느끼게 되면 환상이 해체되고 다른 환상이 구축된다. 그것이 어떤 환상으로 구축될지는 알 수 없다.


"모자이크의 성"은 hold me tight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이 뜻은 당연히 나를 안아줘라는 뜻을 가지지만 동시에 tight, 자기의 신체를 제어해달라는 의미도 표현한다.


인간의 신체는 앞서도 말했지만 통제가 불가능한 것, 유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에게, 연인이 서로를 꽉 껴안는 것은 신체를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의미를 표현하며, 가장 편한 상태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식이기도 하다. 인간의 신체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해서 제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를 제어시켜주는 타자와 동일한 환상을 갈구하는 주체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동시에 "너의 방"을 모자이크의 성이라는 은유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같은 장소에서 같은 환상을 갈구한다는 뜻은 타자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고 싶다는 환상의 표현이다.


분석은 환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의 환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가 결정된다. 주체가 현실에 대하여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분석의 시작이 된다.


"붉은 애나멜"은 부분대상인 붉은 구두를 통해서 사랑이 식은, 환상이 사라진 주체를 논하고 있다. 주체는 타자에 대해서 부분대상으로밖에 욕망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온전한 너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부분만을 보고 욕망한다. 윤기넘치는 머리카락이나, 순간의 손동작, 한 순간의 미소와 같이 타인의 부분을 보고 그 사람의 전체를 오해하여 사랑에 빠진다. 이처럼 부분의 대상을 보고 타자를 욕망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다.


붉은 구두를 통해 시작되었던 서로에 대한 사랑이 붉은 구두, 즉 부분대상이 빛이 바래지면서 환상이 깨지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도입부의 멜로디가 전환되면서 붉은 구두를 통해 사랑받던 주체가 상대를 사랑하는 주체로 전환된다. 반면 붉은 구두를 사랑하던 타자는 사랑받는 주체로 바뀌면서 서로에 대한 환상이 전환되는, 전이의 순간이 드러난다. 따라서 붉은 구두는 색이 바래지고, 기존의 욕망의 대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환상이 출현하여 관계가 역전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욕망의 사라짐과 출현에 대한 이야기는 "Desire"에서 반복된다.


결국 Crimson이라는 앨범은 환상을 알고 싶어하는 주체가, MIND GAME, 즉 분석과정에 참여하려는 욕망을 가진 주체가 분석과정을 통해 환상으로부터 깨어나서 다시 현실을 살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삶의 과정에 의문을 가졌던 주체가 분석을 통해 환상을 파괴하고 다시금 새로운 환상을 창조하여 살아가는 주체로 전환되는 과정, 삶을 억눌렀던 주문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주문을 외우며 살아가는 주체로 바뀌는 과정, 그러한 치유의 과정이 드러나는 것이 Crimson이다.




2021-10-18

전체적으로 문장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1부분의 내용을 보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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