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춤(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4.
계속되는 장기침체로 인해 일본은 사회의 활력을 잃어버렸다. 장기침체로 경제만이 몰락한 것이 아니다.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근본적인 희망을 잃어버렸다. 사람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사라질 때 극단에 몰린다.
이러한 장기침체에 더해서 2011년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위기는 가중되었다. 현재 일본은 국가 부채가 1경이 넘으며 혁신 없는 기업의 근무환경조차 좋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사라져버리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두운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반면에 거품경제 시기(1980년대)의 일본은 미국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일본은 거품경제 시기, 각 분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거품으로 인해 자본의 유통속도가 빨라지면서 각 분야에 신속한 자본의 투입이 이루어진다. 거품경제 시절의 일본 애니메이션인 "아키라"나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보면 인간의 손으로 그린 것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 이처럼 자본이란 회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돈이 잘 돈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금리가 인상되면, 이자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돈이 여러분야에 유통되지 않는다. 그런데 금리가 낮아지면 어느 사람이든지 돈을 빌려서 쓰려고 한다. 이렇듯 자본의 유통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돈이 잘 돈다는 뜻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에 자금이 투입되어 자산가치가 높아지는 것 또한 자본의 유통속도가 빨라졌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품경제 시기의 일본은 주식과 부동산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너도나도 주식이나 부동산에 자금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돈이 각 분야에 신속하게 투입되어 호황기를 누렸던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미국의 빌딩을 사는 등 전 세계에 일본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현재 세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어렴풋한 환상은 대부분 이 시기에 투입된 자금의 힘으로 만들어진 허상에 기초한다. 이러한 시대인 1986년에 발매된 나카모리 아키나의 Desire는 거품경제 시기의 일본의 명암을 잘 드러낸다.
거품경제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풍족한 현실을 위해서 미래의 자원을 가져다 펑펑 쓰는 것이다.(이 점에서 대항해시대 이후의 유럽 또한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일본과 다른 점은 근대 유럽은 미래의 자원을 가져다가 학문, 예술의 진보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성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도 미약하지만 어느정도 그 분야의 기초를 쌓았다.) 일본은 망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환상을 구축해놓고, 미래에 벌어들이리라고 예상되는 자본을 끌어당겨 펑펑 쓴 것이다. 미래의 자본을 대출 받아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돈을 쓰던 시대였기 때문에 거품경제 시기의 일본은 굳이 정규직으로 살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바이트족이다. 아르바이트만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자본의 유통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흥청망청 돈을 쓰더라도 무언가 불안한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과연 이러한 풍요로움이 내 것이 맞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이나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돈을 더 쓴다. 빚을 내서 펑펑 써버린다. 그렇게 사치스럽게 멋을 부려도 마음속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다.
5.
이러한 당대인들의 심정을 가사에 담아낸 노래가 desire이다. desire의 무대를 보면 기모노를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의상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는 에도시대를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 탈바꿈하는 과정이었다. 현대 일본인은 아직도 에도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역사의 예술적 반영이 desire의 무대의상에서 드러난다. 에도시대의 복장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입고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는 무대연출을 보면, 일본의 역사가 단번에 드러난다. 일본은 에도시대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지겹기 짝이 없는 무시무시한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에도시대란 무엇인지 알면, desire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질 것이다.
“에도시대”는 일본적 근대의 원형이다. 실권을 가지고 있는 쇼군(장군)은 나라의 상징이 아니었다. 이러한 쇼군은 현재 일본 수상으로 이름만 바뀐 채 유지되고 있다. 쇼군을 보좌하면서 행정체계의 수장을 맡았던 로주는 지금의 관방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행정체계에 있어서도 에도시대는 현대 일본의 원형인 것이다.(일본사 관련 서술은 요나하 준, "중국화하는 일본", 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를 참조했다. 이하 "중국화")
일본의 상징은 일왕이지만, 정치적 실권이 없다. 중국의 황제와 다르게 지위와 권한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에도시대의 특징이며, 현대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권위는 일왕에게 있지만 정치적 결단은 수상이 행한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지위와 권한이 일치하기 때문에 황제를 기점으로 정치권력의 일원화, 전제독재를 행할 수 있었다.(중국화, 47~51)
에도시대에 이르러 다이묘의 보호 아래 모든 가문이 가업을 물려받는 일이 정착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일본은 신분제 사회였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다이묘의 지역 지배를 통해 지역밀착형 생활방식이 고정되면서 가업을 물려받는 신분제 사회도 고착화된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의 일이 농업이면 아들도 농업을 물려받는 식으로 직업이 고정되었기 때문에 사회의 활기, 즉 유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중국화, 86)
현대 일본에서도 가업을 물려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전통문화를 가문 대대로 보존하고 발전시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가업의 승계가 보편화되면서 사회 전체가 고정되어 지위변동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즉 현대 일본은 에도시대의 시스템에서 큰 발전이 없는 것이다. 여전히 국민들은 정해진 직업에 종사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계변화의 추세를 따라서 대다수의 농민이 회사원으로 변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일본의 역사는 지겨운 과정의 반복이다. 거기에는 역사의 진보나 발전, 혁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개량만이 존재할 뿐이다.
근대국가는 정치학적 측면에서 보면 의회정치의 발전사로도 논할 수 있다. 문제는 이권을 가지고 다투어야 할 의회정치의 영역에서 개헌vs호헌을 가지고 싸우는 자민당 세력과 민주당 세력이 존재하는 일본의 정치현실은 이상한 것이다. 사실은 국민의 대표로서, 이권을 가지고 싸워야 정상이다. 현재 일본은 다당제 국가이지만, 선거분석의 도표 같은 것을 보면 개헌세력vs호헌세력으로 나누어서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자민당이라는 개헌세력과 민주당(과거에는 사회당)으로 대표되는 호헌세력의 대결이 주된 관심사이며 55년 체제 이후로 변한 것이 없고 그 55년 체제는 실상 에도시대의 연장선인 것이다. 사실 개헌이란 일본의 도련님들이나 좋아하는 체제변혁의 취향일 뿐이며, 국민들의 의사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헌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일본은 과거에 평화헌법을 무기로 군비를 증강하지 않았고, 대신 미국에게 안보를 맡겼다.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최전선으로 한국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그렇게 군비를 아낌으로써 남는 돈으로 인프라에 투자하여 경제재건을 이루어냈다.
그 역사적 실례를 교훈으로 삼는다면, 개헌을 하지 않고 평화헌법을 준수하여 확보할 수 있는 자본으로 복지를 증진한다던가, 인프라를 보수한다면 지금의 명예를 어느정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평화를 존중하고 진심으로 사죄함으로써 아시아 전체와 화해하여 새로운 리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진보학자들이 주장하는 미래상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도련님들에게 지금의 민주주의 일본은 만족스럽지 않다. 도련님들이 원하는 환상 속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거쳐 성립된 제국주의 일본이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그 도련님들이 아름다운 나라를 되찾겠다는 구호로 개헌을 시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도련님들의 꿈의 세상은 제국주의 일본이다.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정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렇게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환상을 쫓다가 마침내 파국에 이르렀던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또한 노동조합이 회사 아래 종속되어 있는 것도 문제이다. 원래 노동조합은 금속노조나 공무원노조의 경우처럼 동종업계별로 모여서 자신의 이권을 주장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일본은 회사 아래에 노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회사(영지)안에서 다이묘(기업 회장)와 지역주민(회사원)이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노조가 거세게 나올 경우 회사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며 타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권을 다투며 끝까지 가는 투쟁은 목격하기 어렵다. 결국 회사원은 기업에서 제공하는 평생의 복지혜택을 바라며 한 직장에 뼈를 묻는 종신고용제도 아래 놓여있는 것이다.(중국화, 88~90)
이렇듯 전후의 빛나는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아름다운 나라의 실상은 에도시대의 연장에 불과했다. 나이토 고난이나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주장했듯이, 일본은 오닌의 난 이후 역사가 끝났다. 케인즈주의의 종언 이후 전 세계적 시장자유와 금융화의 시대에 뒤떨어져 점점 성장이 둔화되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은 필연이다.
전 세계적으로 시장의 자유가 확대하는 시기였던 신자유주의는 미국과 영국, 중국의 시대로,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1978년이 그 원점이다. 중국과 영국, 미합중국이라는 3국이 선도해서 이끌어나간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다.(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아카데미) 이러한 세계가 성립되고 30여년이 지난 후 일본은 거품경제의 붕괴를 시작으로 모든 개혁이 정지되었으며,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라는 재앙에 이르렀던 것이다.
6. 다시, 악마의 춤
desire의 다음해, 나카모리 아키나가 1987년에 발매한 tango noir(검은 탱고)는 악마의 춤을 탱고라는 형식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예로부터 사회적으로 용인된 형식이나 내용에서 벗어나 배제된 것들은 악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배제된 존재, 사회로부터 용인되지 않은 행위를 하는 인간이 악마일 것이다. 악마는 그 어떤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존재의 대립물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이다. 우리는 모두 악귀나 다름없는 것이다.
지겨움으로부터,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마의 춤을 춰야한다. 모두가 죄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악마의 춤을 춰야한다. 스텝을 밟아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기존의 사회로부터 배제된 형식의 새로운 춤을, 다시 악마의 춤을 춰야한다. 그래서 다시 악마의 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지겨운 나라다. 에도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스템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어떠한 개혁이나 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의 형식적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비국민 취급을 당하는 나라다. 이런 사회에서 악마의 춤을 춘다는 것은 형식에서 벗어나 배제된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정열을 분출하는 경우에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강조했던 “파토스”이다. 미국식으로는 페이소스라고 지칭되는 그것이다.
예술은 정신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리를 표현한다. 고급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상관없이 시대의 진리를 드러낸다. 헤겔이 예술철학에서 이야기했듯이, 진리라는 내용이 형식을 갖추어 표현된 것이 예술양식이다.
나카모리 아키나는 악마의 춤이라는 형식으로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나라 일본의, 어쩌면 지금 일본에게도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앨범 Crimson의 마지막에 위치한 “믹 재거에게 미소를”이라는 곡(어쩌면 노래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일 수 있다)은 나카모리 아키나의 일상생활에서 나는 소음과 함께 시작한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 서서히 들려오다가 마침내 일상의 목소리와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목소리와 노래를 부르는 환상의 나카모리 아키나의 발화가 일치하는 지점이 다시금 나의 머리카락, 즉 나의 카미, 나의 정신이라는 가사인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분석을 통해서 정신은 자기의 순수한 욕망을 창조하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실현하는 신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신적인 존재는 자기를 끊임없이 창조해가는 주체이며, 자기를 스스로 구원하기에 이른 존재이다.
세계로부터 배제된 존재에 대한 몰입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원동력이 된다. 정보와 지식의 홍수, 즉 대타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잠시금 쉬어갈 필요가 있다. 언어의 끊임없는 홍수로부터 벗어나 잊어버린 것에 대해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2021-10-18 수정
전체적인 문장구조와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5. 일본의 역사파트를 보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