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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 pire Sep 17. 2021

인간의 의지와 순수욕망

1770~1981 결단주의의 역사

“가족이라는 삶의 원리에 땅, 곧 견고한 토대(근거)와 경작지(땅)가 그 조건이라면, 산업에는 그를 외부를 향해 부흥하게 하는 원소인 바다가 그 조건이다.”
헤겔 “법철학 요강”, 247절     

눈 밝은 독자라면 나의 상술 속에서, 243~246절이 맑스주의에 와서 전개되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위 247절을 전개시키려던 시도의 단초를 발견할 것이다.
- 1981년 4월 10일
  칼 슈미트     

 칼 슈미트 “땅과 바다”, 김남시 옮김, 꾸리에. 133쪽 인용. (헤겔 번역은 옮긴이가 일부 수정하여 인용)          


칼 슈미트

나치 부역자라는 혐의를 받고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20세기에 가장 위험한 법철학자라고 불리는 칼 슈미트.     

 

칼 슈미트가 써낸 책 중에서 “땅과 바다”는 인류의 고전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폐관수련이라는 단어가 있죠.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수행에만 집중하는 것을 일컫는데요.


칼 슈미트는 포로수용소 생활을 끝마치고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채 침묵을 지키며 책을 씁니다. 이때 방문해서 가르침을 청했던 몇몇의 학자들이 있는데요. 헤겔철학의 주석가인 알렉상드르 코제브도 그중 하나입니다. 코제브는 슈미트에게서 국제관계와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얻고서 “유럽경제공동체(유럽연합의 전신)”를 창설하는 데 전력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브뤼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코제브

이처럼 칼 슈미트는 유럽사에 어마어마한 사상적 영향력을 끼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나치로부터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사상가”라는 딱지가 붙어 모든 직위에서 쫓겨나기도 했죠. 그래서 그의 나치 전력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이 많은 점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너무 긴 이야기가 될 수 있어 그만 줄이기로 하겠습니다.  

    

“땅과 바다”는 칼 슈미트가 은둔하면서 딸인 “아니마”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성한 책입니다. 아니마는 라틴어로 “영혼”이기도 하죠. 영혼에게 들려주는 역사철학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딸이라는 매개자를 거쳐 다시 영혼에게 재전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철학책인 셈입니다.

정신 – 인간 – 정신이라는 전달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건 헤겔철학의 구조와 똑같습니다.    


이 책은 국역본으로 보면 이 133페이지가 끝입니다. 그래서 분량이 길지도 않고, 글자 수가 많지도 않은 얇은 책입니다. 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읽다 보면 대단히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땅의 존재, 땅을 밟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견고하게 정초된 대지 위에 서서 걸어가고 움직이지. 그 대지가 그가 서 있는 곳이자 그의 토대다.

땅과 바다, 7쪽.

 

인간은 기본적으로 땅(대지)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따라서 바다는 인간에게 땅에서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적 조건은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자신의 실존을 바다 쪽으로 돌렸고 그것을 바다 원소의 중심에 놓았어. 이를 통해 영국은 수많은 해전과 전쟁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뭔가 훨씬 더 다른 것, 바로 혁명을 성취할 수 있었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공간혁명이 그것이야.

땅과 바다, 69쪽.      


영국이 해양권력으로서 패권을 잡은 것을, 바다를 향한 실존적 결단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당화하는 대목입니다. 영국의 이러한 결단을 통해서 인간은 땅의 존재가 아니라 바다의 존재로 전환되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역사철학적 견해를 헤겔로부터 인용하여 산업의 부흥, 즉 경제발전과 근대국가 구축의 논리와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생산성의 향상이나 생산구조의 혁신 혹은 국가전략의 변화를 통해서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다루는 학문들이 있습니다. 이 학문들은 인과성의 원칙에 따라서 생산성이 저하됐다면 왜 그런가를 따져보고 그 사례에 적합한 원인을 따져 묻습니다.      


원인을 따져 묻는 것은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철학은 그 원인에서 더 나아가 가장 근본적인 것인 인간 존재의 변화까지 따져 묻습니다. 그래서 철학이 메타학이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즉 칼 슈미트가 생각한 산업혁명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가 바다를 향해 결단함으로써 땅의 존재에서 바다의 존재로 바뀌었다는 점이 결정적이라는 것이죠. 즉 경제발전의 원인을 "인간의 의지"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은 일본 또한 예전부터 해양국가였는데 왜 영국이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이르렀을까 하는 점입니다. 또한 최신 역사학에 의하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며 사실상 최초의 자본주의에 이르렀던 나라는 송, 원, 명이었으며 명나라가 계속해서 바다를 향해 결단하여(정화의 대원정) 세계 항해를 이어나갔으면 서구의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습니다.(요나하 준, 중국화하는 일본 참조.)      

그렇다면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는 “유럽중심적 사고방식”이 들어있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중심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칼 슈미트가 탐구하는 자세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 의지의 결단이 모든 역사적 행위의 원인이라는 점을 발견한 탐구자세가 그것입니다.      


모든 역사적 행위는 인간 의지의 결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현대사회가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에서 누락되지 않기 위하여 잘못된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가죠.      


칼 슈미트로부터 배운 유럽경제공동체의 주역이자 헤겔 주석가인 코제브의 친구가 바로 자크 라캉입니다. 라캉은 코제브의 헤겔 강의에 열심히 참석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라캉은 잘못된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대로 행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행위인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면 소외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라캉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이렇게 행동하게끔 만드는 사회구조나 관습은 모두 허구에 기초한 것이고, 원래 모든 존재는 공백에 불과하다는 존재론을 인식하고 – 거기서부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자기만의 것을 향해 욕망하라는 것이 라캉 중기이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추구하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헤겔로부터 참으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결론은 간단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혹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면 세상은 반드시 좋아집니다. 최근의 세상을 보니 그러한 소극적이지만 낙관적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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