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 분석가는 침묵한다.
이론으로만 프로이트, 라캉을 공부했을 때는 그 침묵이 그저 공백을, 무의식을 불러내려는 일종의 소환술에 가까운 것이라고 여겼다. 착각이었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분석가는 침묵한다. 환자인 분석수행자만이 혼자 여러 말을 떠들 뿐이다. 그러한 목소리, 발화의 대다수는 별 의미가 없다. 그 발화의 대부분은 분석수행자의 무의식이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말은 대부분 타인의 말이다. 타인의 말이 주체의 입을 빌어 대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석가는 침묵한다. 정신분석의 관심사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주체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무의식을, 자기의 목소리를,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분석가는 침묵한다. 그 과정에서 들려오는 온갖 목소리들을 담담히 받아낼 뿐이다. 분석가의 무의식은 침묵하고, 그저 받아내기만 한다. 그는 한 사람의 주체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세상의 목소리들에 대해서 그저 듣기만 할 뿐이다.
환자는 당황할 수 있다. 기존의 심리치료는 상담사에게 말을 하면,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어요. 세상사는 것이 버겁고 두렵습니다.”
“맞아요. 세상사는 일은 정말 힘들고 외롭죠.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봅시다.”
이처럼 심리치료에서 상담사의 반응이란, 환자의 고통을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이 좌절되거나 하면 심리적 고통이 따라온다. 그 고통에 공감을 해주고, 힘이 되는 말을 해주면 마음이 진정되고 평온해지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심리치료는 그런 효과가 있다. 같이 고민하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분석가는 침묵한다. 인생은 같이 고민할만한 것이 아니다. 삶은 주체 스스로 돌파해 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인생의 문제는 곧 욕망의 문제이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은 무의식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가는 침묵한다. 그 침묵으로부터 분석수행자는 자신의 욕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게 된다. 침묵으로부터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으로부터 질문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의식의 문제를 돌파해 내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것을 바라는지,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남이 나에게 바라라고 요청했던 것인지,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나는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분석가는 침묵한다.
이 침묵은 분석수행자에 대한 무시나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나, 혹은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침묵을 통해 질문을, 더 나아가 하나의 주체에 대한 존중을, 그리고 그가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긴 여정을 시작하게끔 하는 침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