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웹사이트에는 추천광고가 뜹니다. 여러분의 검색데이터를 기초로 취향을 분석해서 그에 알맞은 상품을 추천해주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검색데이터를 기초로 영화나 음악을 추천해주는 사이트도 많죠. 마찬가지로 인터넷 서점에서는 여러분의 독서데이터를 기초로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줍니다.
이러한 추천시스템이 바로 알고리즘이죠. 입력과 출력이라는 컴퓨터의 기초원리를 응용하여 소비자에게 상품을 추천해주는 시스템입니다. 이러한 알고리즘은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엄밀한 상징계의 원칙, 즉 언어의 시스템을 통해 작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플랫폼이다”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구글의 경영원칙은 선불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친구와의 친밀한 대화나 연인과의 달콤한 속삭임, 가족과의 정겨운 유대감을 마음껏 즐기세요. 여러분의 검색데이터를 통해서 생활상의 자질구레한 모든 선택은 구글이 대신 추천해드립니다. 대신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바의 명상이나 수행에 집중하세요. 아니면 즐기고 싶은 일상을 즐기세요. 구글은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드릴 것입니다. 이것이 구글이 말하는 “마인드풀니스”, 즉 마음챙김의 경영전략입니다.(오바라 가즈히로, 플랫폼이다, 황혜숙 옮김, 한즈미디어/ 이하 "플랫폼이다")
어떤 영화를 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비슷한 감동을 느끼고 싶을 수 있죠.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다시 반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추천영화의 목록을 살펴보면 됩니다. 다른 영화를 찾아보고 비교하고 검색하는 과정은 생략됩니다. 추천된 다른 영화를 보고 바로 다시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구글의 원칙은 모든 사이트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내면에 집중하세요. 감동받을 시간에 집중하세요. 모든 과정과 선택은 알고리즘이 대신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선택하고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좌절하면서 방황하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서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는 과정이 삭제되어 버렸네요.
구글의 전략이 알고리즘이라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모든 네트워크 세계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은 놀랍네요. 역시 구글의 창업자들은 천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선불교의 원칙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경영전략으로 채택합니다. 따라서 “구글은 다른 세계를 점점 자동화함으로써 물리적인 잡념을 줄이고 과거에 힘들게 내면의 수행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었던 선승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플랫폼이다, 52쪽)
하지만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것은 위대한 경영전략이기는 합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선불교의 원칙과는 다릅니다. 선불교는 이 글의 제목인 "갑자기" 깨우치는 진리에 대해서 설파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사실 서양철학의 진리관에도 "갑자기"의 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캉의 상징계는 로봇같은 존재입니다. 상징계인 언어 또한 입력과 출력으로 이루어져 있죠.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은 최초의 대타자인 엄마를 통해서 언어를 입력당합니다. 입력된 언어는 자연계의 존재였던 내 신체를 재구성합니다. 나는 이제 언어를 통해 내 요구를 욕망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죠. 응애응애우는 소리를 통해 배고픔을 표현했던 과거와 달리, “배고파요”라는 말을 통해서 밥을 먹고 싶다, 그보다 더 나아가 엄마와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합니다. 이것이 언어를 통한 욕망의 출력입니다.
요구를 넘어서는 욕망은 사회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생리현상을 처리하면 욕망이 충족되는 존재가 아니죠. 누군가와 밥을 먹고 싶고, 누군가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어하며, 누군가와 같이 생활을 공유하고 싶은 그런 사회적 관계를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위해 언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코제브가 헤겔에 주석을 달면서, 인간은 자기의식이며 동시에 말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낸다고 이야기합니다. 사회적 관계성에 주목한 거의 최초의 학자가 헤겔이었고, 이러한 관계의 문제를 세계 속에서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확장한 철학자가 헤겔이었습니다.
코제브에게서 헤겔을 배운 라캉은 이에 착안하여 상징계의 원칙, 언어의 구조를 깊게 연구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를 입력당하면서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결론에 도달하죠. 확실히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을 습득합니다.
어린이가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왜 돌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상징하죠. 저라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음료수나 마시고 말겠네요. 그런데 어린이는 끊임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줄넘기를 합니다. 어린이는 그렇게 열심히 신체활동을 함으로써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요? 예전에는 단순히 엄마와 아빠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린이는 인정을 넘어서 자전거를 탐으로써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죠. 미래의 이미지, 상상을 현실로 끌고와서 자전거를 탄다면 분명히 엄마와 아빠는 나를 인정해주거나, 아니면 걱정해줄 것이야. 그렇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거야라는 욕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전거를 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줄넘기를 합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인정을 넘어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자체를 욕망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반복행위는 보통 앞으로 이동하고 뒤로 이동하는, 반복적인 강박행위로 구성되어 있죠. 앞과 뒤로 움직이며 반복되는 행위의 이면에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놀이를 통해 습득하려는 본능의 발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미야자키 하야오죠.
프로이트는 삶과 죽음의 반복을 놀이를 통해 습득하려는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말한 바 있는데요. 술래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술래잡기 놀이는 바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잘 표현하고 있는 고전놀이이지요.
이처럼 아이들의 행위는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분석가인 라캉이나 멜라니 클라인은 모두 어린이들을 집중관찰함으로써 이론의 토대를 확립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언어와 행위, 이 모두가 인간은 관계를 욕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적절한 장치인 것입니다. 확실히 인간은 그저 생리현상의 추구만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욕망합니다. 최근에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지요. 여러 가지 대책이 나옵니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자, 부동산 대책을 확실하게 하여 집값을 안정화시키자, 아이의 교육비를 획기적으로 감소시켜야 한다... 등등이 그런 대책이죠.
그런데 진짜 큰 문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결혼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사라져버렸죠. 결혼이나 출산을 욕망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결혼도, 출산율도 감소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에 대한 욕망이나 이미지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죠.
이 욕망 자체는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알고리즘이 추천하면 뿅하고 욕망이 생겨나서 결혼해야지!하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알고리즘은 외적 변화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인간의 깊은 내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내면 그 자체를 움직이는 것은 언어적인 것을 넘어서는 충동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문득 소고기가 먹고 싶어졌다고 해볼까요. 알고리즘은 경제적 합리성과 시간의 절약, 가정생활의 윤택함을 고려하여 나에게 돼지고기를 권장합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꼭 소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하필 소고기입니까? 그건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갑자기 문득 무언가가 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삶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앗!이거다싶은 순간이 있으셨을 겁니다. 그런 계기는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갑자기 든 내면의 생각일 수도 있고,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린 잡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죠. 인간의 삶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하기 때문이죠.
그 갑자기의 순간은 언어로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갑자기의 순간은 내면에서 일어난 실존론적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갑자기”의 순간이 등장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은 액자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폴로도로스가 오래 전에 있었던 사랑에 관한 토론을 전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죠.
그런데 향연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15년 정도가 지난 즈음에 집필되었는데요. 즉 이 사랑이야기에 참석했던 인물들은 모두 펠로폰네소스 전쟁,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내전으로 인해서 사망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듣거나, 책으로 읽었던 사람들은 모두 지금은 없어진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열정적 토론을 회고하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음미했겠죠.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철학함의 자세를 유지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생님인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이야기했는지 평생을 다 바쳐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철학함의 태도를 “에로스의 학”으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어서 애타게 완벽함을 갈구합니다.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에 가까운 것을 갈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며 애타게 그리워하죠. 이것이 에로스의 태도, 철학함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의 경지를 바라다보기(관조, Theorein)위해서 어떤 계기가 필요하냐면, 바로 “갑자기”입니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의 신비주의적 측면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갑자기의 순간을 여사제 디오티마로부터 가르침받습니다.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그러니 이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해보세요.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차례 올바로 바라보면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여기까지 인도된 자라면 이제 에로스 관련 일들의 끝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플라톤, 향연,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10e)
갑자기 아름다움의 경지를 직관, 관조(Theorein)하던 주체는 마침내 진리를 깨닫고 이론(Theoria)으로 만들어내죠. 이것이 학문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아름다움을 바라다보는 순간, 이 순간은 언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도 갑자기의 순간을 진리가 나타나는 번뜩임의 순간으로 집어넣은 것이지요.
알고리즘의 추천으로는 확보하기 어려운 갑자기의 순간. 이것은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순간이죠.
살아가다가 문득,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은 순간이라던가 우연히 지나치던 거리에서 바라다본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꽃의 모습, 태어난 아기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엄마의 손을 잡는 순간들. 갑자기의 순간은 인생에서 여러 번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이 알고리즘의 추천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하죠.
따라서 인생의 과정에서 출현하는 번뜩이는 갑자기의 순간들은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진리의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불교에서 추구하는 진리이며, 선승들이 갈!하고 외치는 순간이기도 하죠. 선불교의 진리관이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의 철학과 접점을 이루는 순간, 이것이 왜 접점을 이루느냐면 진리가 출현하는 과정은 내용은 다를지언정 동일한 형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갑자기의 순간입니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고 표현되어서도 아니되는, 그럼에도 길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