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lon
부서진 꿈의 하이웨이
요즈음 일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눈뜨고 보기 어려운 지경입니다만, 80~90년대 거품경제 시절, 일본의 예술작품들은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넘쳐나는 자본의 투입이 활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때의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잘 나간다는 사실에 여유로움이 넘쳐서 무엇이든 허용해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여유가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용납해주는 분위기가 있었죠.
이건 사실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식민지에서 막대한 양의 은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국제결제통화가 "은"이었기 때문에 유럽은 식민지로부터 돈을 훔쳤다고 말할 수 있죠. 남의 돈을 훔쳐서 여유가 넘쳐난 유럽 귀족들이 예술가와 과학자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기 때문에 일어난 성과로서,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창피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죠. 이 당시 유럽 귀족들은 그야말로 여유가 넘쳤고 돈도 남아돌았기 때문에 조금 신기하다 싶으면 바로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대 유럽은 예술과 과학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죠.
1980~90년대 일본도 돈이 넘쳐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예술적 성취 또한 넘쳐났습니다. 마음에 풍요가 생기면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인간의 본성인 듯합니다. 나카모리 아키나의 이 노래도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노래입니다.
얼마 전까지 사랑노래를 불렀던 아이돌이 천사와 악마가 샴페인을 터뜨리는 바빌론을 묘사하고, 거기다 빙글빙글 도는 지구라든지, 멈출 수 없는 불가사의한 파워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가사를 떠들어대니까, 평소 같았으면 뭐야 이게 라고 말하면서 화를 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바빌론은 Bitter&Sweet에서 Bitter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으로 바빌론이라는 장소를 무대로 해서 맛가버린 일본 자체를 은유합니다. 제가 Bitter&Sweet라는 앨범에 주목하는 이유는 겉으로 보았을 때는 그저 사랑이야기나 혹은 신나는 댄스곡 위주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사나 당시의 퍼포먼스를 보면 이렇게 뼈가 들어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인데요.
이 곡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사는 “부서진 꿈의 하이웨이”입니다.
마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를 예언한 듯한 가사로 고속도로라는 현대사회의 가장 최첨단에서 길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또한 데이빗 보위의 “나는 미쳤다”라는 곡과 함께 시작하죠.
나카모리 아키나의 이 곡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문명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천사와 악마가 샴페인을 터뜨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지구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잔뜩 취해서 모든 것이 덧없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죠.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계속된다는 테마가 이어집니다. 이제 현대문명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죠.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이 곡의 무대인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미쳤다는 것을 상징하는 노래로서, 부서진 꿈의 하이웨이라는 가사는 우리 모두가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차피 시작된 축제라면 마음껏 즐기는 것이 좋겠죠. 그래서 이 곡은 확실히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는 화자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곡이 Bitter, 씁쓸함이라는 파트의 대미를 장식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Bitter, Sweet, Confusion?이라는 가사가 등장하네요.
이렇게 혼란스러운 바빌론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가사로 끝나는 이 곡은 아비규환의 당대 일본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품경제의 이면은 잔혹한 탐욕과 공포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웃음과 돈잔치와 더불어 허망한 낙관주의가 떠돌았지만 말입니다.
다음 곡부터는 Sweet파트가 시작됩니다. 이 파트부터는 이러한 아비규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