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리를 터득한다는 것.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 글의 뜻을 깨달아 안다는 것. 이것은 말하자면 정합적인 지식, 체계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지식, 확실한 지식, 또 말하자면 세계를 이해했다는 것,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두루두루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해하기 때문에 불안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문리를 어떻게 터득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교과서의 반복학습, 흔히 교과서나 자습서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는데, 그것을 반복학습하여 외우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외우기만 해서는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노력한다면, 깨달아 알아낼 수 있다는 자기확신이 있다면 문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그 어느 차원에서나 가능하다. 당구를 치기 위해 큐대를 잡기 전에 마치 기도를 하듯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샷을 수행하는 선수가 있다. 해설자는 이를 “종교적 태도”라고 말하나 이것은 종교적 차원으로만 해석될 것은 아니고, 타자와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경쟁에 들어간다는 것, 그렇게 자기를 분열시켜 자기가 자기와 경쟁한다는 것, 그 수준에 올라서서 마침내 문리를 어느 정도 깨우쳤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점에서든 자기가 자기를 분열시켜 자기 → 자기를 바라보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이며, 근대에서는 데카르트의 자기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역사, 세계, 더 나아가 우주 전체를 조망한 이가 헤겔이며 이러한 초월론적 태도를 통해 지식의 체계는 완결되었다. 이 완결은 자기순환적인 진리로서, 마침내 철학은 자기안에서 끝났고, 이제 타자의 시선에서 다시 해체될 일만이 남은 셈이었다. 이를 체계적으로 수행한 이는 아직도 없기 때문에 철학은 그안에서 종말에 이른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