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국이 싫어서]를 보고
휴일을 맞아 간만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하루종일 신나게 뛰어놀고 따뜻하게 목욕을 하고 나니 아이들이 평소보다 일찍 곯아떨어져
간만에 부부간에 고요하게 보낼 수 있는 달콤한 휴식이 주어졌다.
집에서는 아이들 때문에 잘 틀지 않는 TV를 켜고,
OTT에 있는 수천 가지 영화 목록을 살펴보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잔잔한 영화라 애들이 깨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아내가 예전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원작이라고 하고,
나는 나대로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평소에 많이 보기에 호기심이 생기는 제목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몇 가지 느낀 바가 있어 오랜만에 브런치에 몇 줄 적어보기로 했다.
영화를 다 보아야 이해가 되는 얘기일 거라, 가급적 영화 전편을 찾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목표와 성취를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평가절하 당하며 괴로워지는 계나
영화 속 주인공은 녹록지 않은 환경과 배경을 나름대로 열심히 극복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꽤 낮은 위치에 속해 있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만,
누구든 알아줄 만한 인서울 대학을 나오고,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미래를 기대해 볼만한 직장에 들어가고,
몸도 마음도 훈훈한 남자친구와 오랜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까지 계획을 하고...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들을 성실하게 만들어 나가는 훌륭한 청년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계나는 의욕이 꺾여서 주저앉기 시작한다.
그건 그동안 너무 악착같이 힘을 쥐어 짜내며 지내느라 지친 영향도 있을 것이고,
또 그가 피땀 흘려 겨우 손에 쥔 것들이 의미 없는 것들이라 느껴질 때
차츰차츰 무언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티끌 모아 저축해 놓은 돈에 대해 이사에 들어갈 당연한 자금으로 가족들로부터 요구받을 때,
직장에서 기준도 원칙도 없는 방식으로 일처리 하는 것을 강요받을 때,
예비 시부모님이 될 수 있는 분들이 계나의 집안 조건에 대해 대놓고 탐탁지 않아 할 때...
그동안 한층 한층 쌓아 놓은 공든 탑은,
스스로 또 주변으로부터 '그것 밖에 안돼?'라며 계속 평가절하되었다.
아무리 탑을 아슬아슬하게 높게 쌓아도,
주변의 말도 안 되게 큰 탑들을 보며 '저 정도는 쌓아야지.' 하며 보잘것없어 보이기만 했다.
그나마 모아 놓은 물적/심적 자원을 바탕으로
그다음 단계로 세울 수 있는 목표와 비전을 제시해 주거나 찾아 나가는 사람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그걸 부당하게 이용하려 하거나 비교하면서 깎아내리는 것 같은 사람들만 보였을 뿐.
내가 가진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무언갈 얻기는 어려울 거라고 예상하면 그 사람이 느낄 감정은 좌절감 밖에 더 있겠는가.
행복에 대해 우리가 하고 있는 착각
'행복한 삶', '행복한 사람'이라는 목표가 나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 또한 행복한 삶을 위해 하루하루 힘을 짜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이 최종 도착지,
한번 도달하면 영속하는 상태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살다 보니,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여행 끝에 도착하게 되어 영원히 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여행 중간중간에 잠깐씩 느껴지는 감상들에 가까운 것 같다.
천신만고 끝에 뉴질랜드에 도착하면 '행복의 땅에 도착했습니다.'가 되는 게 아니라,
여정 중에 지나치는 예쁜 구름,
언덕 꼭대기에 올랐을 때의 상쾌함,
함께 손잡고 가고 있는 사람과 깔깔 웃으며 나누게 되는 대화...
여행길 속에 이런 기분 좋은 일들이 잠깐씩 스쳐가고,
마지막에 도착하면 '아, 행복한 여행이었어.' 하고 추억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한 여행 끝에는?
또 다른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기 마련이고.
그런데 행복이 최종 도착지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는 동안에 느껴지는 고통들을 이 악물고 참아가며,
좋은 풍경들은 거들떠볼 새도 없이 강행군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막상 도착하였을 때 느껴지는 성공의 느낌은 얼마 가지 않는다.
그러면 허탈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고작 이걸 위해 그 고통을 감내했나.'
'그동안 내가 나름대로 애써온 모습들이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다음에 놓여 있는 다음 여행길이 펼쳐졌을 때에는
두 번째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그 짓을 어떻게 또 하지? 왜 해야 하지?'
목표가 있으면 멈추지 않을 수 있고,
과정에 집중하면 무언가 하나는 얻어갈 수 있다.
영화에 보여지는 순간들 중, 주인공이 나름의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묵묵하고 꾸준히, 그리고 약간이라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대입, 취직, 결혼 등, 자의건 타의건 목표가 세워져 있을 때 말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그런 목표의식이 반복적으로 희미해지거나 무너지고 때 절망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그러다 뉴질랜드에 가서 좌충우돌하면서도 나름대로 즐겁고 희망에 찬 모습이 보여질 때면
'한국에서 벗어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기대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허름한 창고방에서 거주하며 최저시급 알바를 전전하면서도 몇 년을 버텼지만,
[영주권]이라는 목표가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한순간에 좌절되며 계나의 의지는 또다시 꺾여버린다.
한국에서 겪었던 절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계나가 한국에서와는 달리
주위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든지,
아름다운 자연 광경 같은 여행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전보다 조급했던 모습에서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바뀐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엔 결국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곳으로 찾아가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답답하기만 한 결말이 아니라, 약간의 희망을 보여줘서 좋았다.
쓰다 보니 너무 꼰대 같고 상투적인 소리만 끄적여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사실 인생의 진리에 가까운 것들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참신한 어떤 것이기보다는
(그런 걸 잘못 따라가다가 사이비나 사기에 빠지더라는...),
아기 때부터 보았던 그림책의 교훈 같은 얘기처럼 뻔히 알고 있는 것들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교훈을 뼛속까지 새기려면 결국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 먹어 보아야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게 된 건,
멀고 험한 당나라 유학길 중에 노숙을 하며 토굴 안에서 덜덜 떨면서 먹었기 때문이지,
자기 집에서 편히 누워 있다가 어디 담긴 구정물을 먹었다고 해봤자
'에이 퉤!' 하고 기분만 나쁘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감명 깊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이나 그가 속해 있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가는 주인공의 하루하루가 우리의 매일처럼 그 자체로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