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진료가 꺼려지는 흔한 이유들
저는 처음 진료를 보러 온 분들께 항상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정신과(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 진료를 보러 와야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러면 대부분 "사실..."로 시작하여 병원에 찾아오기가 주저되었거나 어려웠던 이유를 털어놓은 후
"그래도..."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도 찾아오게 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우리나라 통계에 따르면,
전 국민의 4명 중 1명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정신질환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 중에 12~13%만이 정신과 진료를 본다고 합니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 8명 중에 7명은
"사실..."이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여러 어려움들 때문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기 잘하셨습니다." 라며 자주 설명드리는,
정신과 진료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낮출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드려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심리적인 장벽을 주로 다루고, '정신과에 가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라는 오해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로 병원에 와야 되는 건지 잘 몰라서 못 왔어요.
코가 막히거나 발목을 삐끗했을 때에는 보통 큰 고민 없이 병원에 찾아갑니다.
그런 증상을 이전에도 많이 겪어 봤고, 어떤 병이고 어떤 치료가 도움이 될지 얼추 예상이 되기 때문이죠.
기침을 했는데 가래에 피가 묻어 나왔다, 이럴 때도 주저 없이 병원에 갑니다.
겪어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심해졌을 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대략 상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기분이나 생각,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면 병원에 갈 생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게 증상인지 아닌지, 병 때문에 그럴 수 있는지도 잘 몰라서 병원에 간다는 결정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설령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정신과에 간다는 건 왠지 부담스럽고,
남들은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데 나만 유난 떠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몸의 다른 데가 아플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마음이 힘든 게 병인지 아닌지,
치료가 필요한지 아닌지도 전문가의 소견을 받아보아야 합니다.
정신질환의 증상은 눈에 보이거나 피부로 와닿지 않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울, 불안,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인지, 사고, 의사결정 능력이 떨어져
현재 본인의 상태에 대해 더더욱 부정확하게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신과 의사는 어떤 기준으로 치료가 필요한지 판단하는 걸까요?
뼈가 부러진 것처럼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고 딱 알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말이죠.
물론 요새는 뇌파 검사, 자율신경계 검사처럼 무언가를 측정해 볼 수 있는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진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보조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의학이 더 발전하여 누가 봐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진단을 내려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의사의 임상적인 판단이 진단을 내리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정신과에서는 [병에 걸렸다], [치료가 필요하다]라는 임상적 판단을 내릴 때, 두 가지를 중요하게 봅니다.
본인 스스로 증상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당연히 치료를 받아볼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힘들지 않다 주장하더라도
증상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을 때에도 문제라고 봅니다.
결국에는 그 나쁜 영향이 당사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감정상태, 사고방식, 행동변화는
한 사람의 학습/업무 기능, 대인관계 기능, 일상생활 기능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잘 못 하게 되고, 안 해도 되는 짓은 자꾸 더 하게 됩니다.
해야 할 일을 잘 못하게 되면 일에 실수가 생기고, 지각을 하고, 집안일을 놓아버려 집이 엉망이 됩니다.
과소비, 폭식, 음주처럼 안 해도 되는 짓을 자꾸 반복하고, 사람들과 불필요한 마찰과 분란도 자꾸 생깁니다.
결국 병적인 모습이 악화됨에 따라 생활에 악영향을 끼치고,
그 악영향이 증상을 재차 악화시키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첫 진료의 마지막에 그동안 생활에서 나타난 이러한 나쁜 변화들을 짚어 내고,
치료의 필요성에 대해 환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드리며 마무리를 합니다.
그런 이유를 전문가가 객관적으로 짚어줄 때,
환자는 치료의 필요성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정신과 약을 먹으면 중독될 수 있고,
멍해져서 하루종일 자고 바보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약물치료든지 부작용이 없거나 최소로 겪으며 필요한 효과만 볼 수 있어야 좋은 치료입니다.
정신과 약물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에는 푹 자고 낮에는 멀쩡한 정신으로 직장도 가고 공부도 하면서 치료가 되어야지,
약을 먹고 하루종일 멍하고 졸려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간다면 약을 잘못 복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약의 종류와 용량에 따른 반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지도 하에 자신한테 맞는 조합을 찾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낮은 용량부터 약을 시작하여 효과와 부작용을 봐 가며 최적의 조합을 단계적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운이 좋으면 일찍부터 잘 맞는 조합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부작용 때문에 몇 가지 약을 바꿔 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초기 과정에서 정신과 약물치료에 대해 안 좋은 인상만 남은 채 중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치료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약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의사와 상의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정신과 약이 다른 과 약보다 독하다는 편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과 약들은 기본적으로 수 주~수개월의 복약 기간을 고려하고 개발되기 때문에,
진통제나 항생제처럼 단기간 복용하게 되는 약들보다 절대적으로 더 '독하다'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치료 효과보다 부작용으로 인한 문제가 더 큰 약들은 언제나 금방 퇴출되기 마련입니다.
약에 의존해서 좋아지면 스스로 극복하는 게 아니고,
약 없이는 못 살게 되지 않나요?
우리는 흔히 정신과 신체를 따로 떼어 놓고, 그 두 가지를 마치 별개인 것처럼 인식합니다.
그런데, 사실 정신이라는 것은 [뇌]라는 신체기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물론 뇌의 작동원리는 음식이 소화되거나 심장이 뛰는 것보다는 복잡해 보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정신과 약은 뇌와 신경계에 주로 작용하는 물질입니다.
소화제가 위장관에, 고혈압약이 심혈관에 작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정신과 약은 신비스러운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100년 전, 200년 전까지만 해도 항생제가 없어서 요즘 같으면 일주일 약 먹고 간단히 치료될 병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었습니다.
그러다 항생제가 발명된 순간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기하고 큰 충격이었을까요?
지금이야 항생제라는 것이 우리 생활과 인식에 너무나 깊이 자리 잡아 그게 대단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약은 아직 비교적 새롭고 낯선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과도한 신비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과 약은 단지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내가 하지 못할 것까지 해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컨디션이 나쁘면 평소엔 쉽게 생각했던 문제도 안 풀립니다.
그런데 컨디션이 회복되면 실력발휘가 됩니다.
약물치료는 거기까지 도와주는 거지, 내 실력으로 안 되는 어려운 문제까지 풀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런 약이 있으면 저부터 먹고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약 먹고 좋아지면 진짜 좋아진 게 아니다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가정(약에 대한 과도한 신비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내 인생이 망가지냐 좋아지냐' 하는 문제가 '약을 먹냐 안 먹냐' 하는 문제보다 수천 배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전문가의 감독 하에 안전하게 치료를 받는다면,
약을 끊는 것은 지금 처해 있는 위기를 넘기는 것보다는 너무너무 쉬운 일입니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는 뼈가 붙을 때까지 목발을 짚고 안전하게 다니며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뼈가 잘 붙으면 목발을 떼는 건 일도 아닙니다.
정신과 진료를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다음부터는 안 갔어요.
초진을 볼 때 이전에 정신과 진료를 본 적이 있는지 여쭤보면
몇 가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약부터 먹으라는 것 같아서,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아서,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지금 힘든 게 하느님의 뜻이고, 교회를 다녀 보자고 포교하기 시작해서,
다양한 이유로 정신과 진료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아 그 후 정신과 진료를 포기했다가
결국 다시 안 좋아져서 찾아오게 된 경우도 많습니다.
정신과 치료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고, 치료자별로 스타일도 각양각색입니다.
아무래도 진료과정이 사람과 사람이 얼굴 맞대고 대화를 나누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니,
환자와 치료자 사이의 궁합, 케미가 어떤지가 치료에 영향을 크게 줍니다.
얘기를 묵묵히 오래 들어주는 치료자의 모습이
어떤 환자한테는 자신의 말에 깊이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른 환자에게는 병원에서 비싼 돈 받고 별로 해주는 게 없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찾아간 병원이 잘 맞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다른 스타일의 진료를 받아보고 비교해 보며 자신에게 잘 맞는 치료자를 찾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병원을 다녀보면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잘 맞았다고 느꼈던 치료자가 어느 순간 불편해졌는데,
그걸 얘기하기는 미안해서 불편함을 안은 채로 진료를 이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료 시간에 '치료자와 진료 과정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라는 주제로 까놓고 얘기를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런 얘기는 왠지 하면 안 될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장담컨대 그 치료자도 뭔지 모를 불편감을 함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환자와 치료자가 서로 간에 느끼고 있는 감정인 전이와 역전이를 다루는 것은 치료과정에서 꽤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정신과에 안 가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물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만이 정신질환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아닙니다.
열심히 운동하기
좋은 사람들과 만나며 대화하기
나쁜 관계를 잘 정리하기
교회나 절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기
모두 정신건강과 정신질환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통계적으로 검증된 하나의 좋은 수단인 정신과 진료를
활용하지 못하거나 않는 것은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전투하러 나가는데 칼, 활, 총, 대포, 돌멩이 등 싹 다 들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이건 좀...' 하면서 확실한 무기 하나를 버리고 가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그만큼 낮아집니다.
몇 주에 걸쳐서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과 이후 상황들로 인해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강화되고,
정신과 진료를 찾아가는 게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혼자서 힘든 마음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느끼고 있는 많은 분들이
심리적인, 구조적인 어려움들 때문에 진료를 받지 않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