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곳'
주말 저녁 TV를 켜면 익숙한 얼굴들이 전국을 누비며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 펼쳐진다. KBS2의 장수 예능 ‘1박 2일 시즌 5’다. 여섯 명의 출연진이 로컬 여행과 복불복 게임, 야외 취침 같은 유쾌한 콘셉트로 전국 곳곳을 찾아간다. 현장에서 뿜어내는 생기와 출연자·제작진의 좌충우돌은 재미를 더하고, 중장년층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국구 여행 가이드’로 자리 잡았다.
이 프로그램이 남긴 것은 단순한 웃음과 추억만이 아니다. 실제로 ‘1박 2일’이 다녀간 지역은 방송 직후 관광객이 몰려든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죽녹원은 평소 하루 1,700명대 방문객이 주말에는 1만 명으로 치솟았다. 벌교는 멤버들이 꼬막을 캤던 방송 이후 주말 방문객이 500명에서 4,000명 이상으로, 무려 8배 가까이 늘었다.
‘1박 2일’은 이름 그대로 ‘체류형 관광’의 상징이다. 체류형 관광은 숙박·체험·음식·문화 등 로컬의 모든 것을 두루 경험하는 방식이다. 정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한 숙박 할인 정책 ‘대한민국 숙박페스타’ 역시 체류형 관광 촉진을 위한 대표 수단이다. 2024~2025년 숙박페스타로 약 240만 명이 지역을 찾았고, 경제효과는 수천억 원에 이르렀다.
단기적으로 숙박쿠폰은 수요를 자극했지만, 앞으로는 지역의 체험·음식·문화와 결합해 장기적인 체류형 관광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숙박페스타가 단순 프로모션을 넘어 지속 가능한 지역관광 생태계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일본은 이미 농촌·어촌 민박, ‘한 달 살아보기’ 워케이션, 가족 단위 농업캠프 등 다양한 체류형 모델을 운영해왔다. 학생들이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부모와 함께 축제에 참가하며, 로컬 셰프에게 요리를 배우는 식이다. 도쿄나 오사카와 근교 소도시·어촌을 묶어 며칠 이상 머무는 ‘살아보기’ 코스도 인기가 높다. 특히 일본은 민간·지자체·주민이 합심해 누구나 장기체류 상품을 쉽게 예약할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을 만들고, 재방문 인센티브, 체험 마일리지, 주민 초청 이벤트 등 세부 요소까지 꼼꼼히 챙긴다.
한국에서도 장기 체험형 관광이 확산되는 추세다. 강진군은 숙박비·체험비의 절반을 지원하는 ‘반값 여행’을 시행했고, 충북 제천·보은·옥천·괴산·단양은 ‘충북 일단 살아보기’를 통해 외지인이 2박 3일부터 2~4주간 머물며 숙박·축제·문화예술·힐링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민관 협력 방식에서 뚜렷하다. 일본은 지역 DMO(관광지역경영기구)를 중심으로 지자체·주민·민간이 긴밀히 협력하며, ‘관계인구’(살아보는 방문자) 유치, 장기체류 콘텐츠, 로컬 일자리 확장 등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냈다. 특히 주민 주도의 체험상품 개발과 민간투자 유치, 스토리텔링과 자체 브랜딩을 일상화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지자체 예산과 공공기관 주도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남도 한 달 살기, 강원 로컬워케이션 같은 장기체류사업은 국·도비 예산이나 한시적 공모사업, 쿠폰 지급 형태에 머물고, 예산이 끊기면 사업도 중단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앞으로 한국의 체류형 관광은 단발성 예산사업을 넘어 민간·공공·주민이 함께하는 ‘양손잡이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 최근 순천 철도문화마을, 강원 산림웰니스, 부산형 DMO ‘모디’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이 등장하면서 주민·상인·청년·전문가가 함께 지역의 문제를 풀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산 의존도를 줄이고, 네트워크형 협의체와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는 것이 자생력 있는 관광 생태계의 기초가 된다.
관광은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소비’가 아니다.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머물고 싶은 곳’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폐광촌이던 강원 고한읍의 ‘마을호텔 18번가’처럼, 주민과 여행자가 힘을 모으면 마을 전체가 특별한 호텔이 되고, 사람도 경제도 돌아온다. 결국 변화는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작은 지역의 꾸준한 노력에서 시작된다.
(우지영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