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아침은 숫자로 시작되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그는 눈을 뜨기도 전에 손을 뻗어 화면을 문지른다. 밤사이 도착한 메일의 개수, SNS 게시물에 달린 하트의 숫자, 그리고 그가 속한 조직에서 매긴 전날의 성과 지표. 그 숫자들은 A를 정의했다. 그것은 오늘 하루 그가 입어야 할 자아의 두께를 결정하는 설계도였다.
A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자아란 외부에서 빌려온 화려한 의복들의 조합이었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 대기업의 사원증, 타인의 선망이 섞인 시선들. 그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매끄러운 표면을 닦아내는 데 생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A는 참 모난 데가 없어서 좋아. 우리가 기대하는 그 이상을 보여주니까."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다. 그 칭찬은 A의 피부 위로 겹겹이 쌓여 단단한 가죽이 되었다. 그는 친절했고, 유능했으며, 언제나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가죽이 두꺼워질수록, 그 안의 무언가는 여전히 투명했다. 외부의 조명이 꺼지고 혼자 남겨진 밤이면, A는 가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거울 속에는 화려한 옷들만 둥둥 떠다닐 뿐,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해질 때마다 더 많은 외부적 가치를 수집했다. 그것만이 그를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같은 도시의 반대편, 혹은 A와 아주 가까운 곳에 B가 살고 있었다. B는 A와 정반대의 질감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세상이 던지는 숫자를 믿지 않았고, 타인의 시선을 소음이라 치부했다. B에게 자아란 타인에게 보여주는 전시물이 아니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깊은 지하 동굴과 같았다.
B는 낡은 작업실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사느냐", "세상의 흐름에 발을 맞춰라"라는 충고가 빗발쳤지만, B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갔다. 그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을 보며 남모를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나만의 본질을 지키며 산다.'
하지만 B의 이 단단한 내부적 가치 역시, 사실은 세상이라는 외부 세계를 향한 강렬한 반작용으로 만들어진 것 뿐이었다. 그가 두른 고독의 가죽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었지만, 동시에 그를 지독한 냉기 속에 가두었다. B는 자신이 독립적이라고 믿었으나, '남들과 다르다'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 사실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대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단단함은 유연함을 잃은 고목과 같아서, 예상치 못한 거대한 충격이 가해진다면 가장 먼저 부러질 운명이었다.
…
세계는 예고 없이 무너졌다. 그것은 영화에 나올 법한 거창한 종말의 풍경이 아니었다. 여전히 방이 있고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밥 한끼와 모든 인프라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그들을 지탱하던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을 멈췄을 뿐이었다. 경제적 붕괴였을 수도 있고, 사회적 약속의 파기였을 수도 있으며, 혹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론적 재난이었을 수도 있다.
A에게 가장 먼저 재앙이 닥쳤다. 그를 정의하던 숫자들이 순식간에 0으로 수렴했다. 회사, 직급, 통장의 잔고, 그리고 그를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관심. 그 모든 외부적 지표가 사라지자 A는 말 그대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봐주세요!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해 주세요!" 하지만 거리는 이미 자신의 가죽을 잃어버리고 유령처럼 떠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A는 뼈만 남은 앙상한 자아를 끌어안고 추위와 공포에 떨었다. 타인이 부여한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시커먼 공동만이 남았다.
동시에 B의 세계도 침식되었다. 세상이 사라지자, B가 그토록 자부하던 '반항'과 고립의 가치도 함께 증발했다. 비춰줄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듯이, 비난할 세상이 사라지자 B의 고집스러운 자아도 갈 곳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동굴 안에서 절규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무런 메아리도 남기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B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켜온 본질이라는 것이, 사실은 외부 세계라는 적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가공의 요새였다는 것을. 가장 단단하다고 믿었던 B의 내면 가치는, 가장 화려하다고 믿었던 A의 외부 가치만큼이나 연약한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했다.
재난의 정점은 소음이 아니라 정적이었다. 도시를 가득 채웠던 데이터의 신호음, 자동차의 경적, 타인의 성취를 중계하던 전광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A는 거리에 서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수천만 원 상당의 맞춤 정장은 이제 그저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그 정장은 그가 유능한 전문가임을 증명하는 가죽이었으나, 그 가죽을 알아봐 줄 눈동자들이 사라지자 그것은 살점을 짓누르는 고문 도구가 되었다. A는 미친 듯이 스마트폰을 문질렀지만, 검은 화면은 그저 그의 초췌한 얼굴만을 비출 뿐이었다.
"누구 없어요? 제 이름 알잖아요. 제가 누군지 말 좀 해줘요!"
그의 외침은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했다. A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얇은 종이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평생을 타인의 시선이라는 조명 아래에서만 춤추는 무희였다. 관객이 떠난 무대 위에서, 조명이 꺼진 암흑 속에서, 그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의 자아는 사라지고 있었다. 겹겹이 칠해진 사회적 페인트가 벗겨질 때마다, 그 밑에는 핏기 없는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 시각, B는 자신의 작업실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는 세상의 멸망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평생 "나는 세상과 상관없다"라고 외쳐왔으니까. 하지만 정적이 길어질수록 B 역시 기묘한 떨림을 느꼈다.
B는 평소 자신이 아끼던 철학 서적들을 펼쳤다. 그 책들은 그가 세상을 비웃으며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사라진 뒤의 철학은 죽은 나무 위에 핀 마른 곰팡이와 같았다. B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켜온 고독한 정의역시, 결국은 속세라는 적이 존재해야만 빛을 발하는 훈장이었다는 것을.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치를 거부함으로써 얻었던 우월감, 그것 역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얻어낸 변종같은 외부적 가치였음을 말이다.
B의 요새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남들과 다른 나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투쟁해왔지만, 이제 증명할 대상도, 투쟁할 명분도 사라졌다. 그가 두른 고독의 가죽은 차가운 얼음장이 되어 그의 심장을 얼려갔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잃어버린 거울을 찾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무너진 요새의 파편을 피해.
잿빛 먼지가 내려앉은 중앙광장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
A는 울고 있었다. 그가 공들여 가꾼 머리칼은 헝클어졌고, 명품 구두는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더 이상 누구도 아니었다. 그저 공포에 질린 하나의 짐승이었다.
B는 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꼿꼿해 보이려 애썼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A보다 더 깊은 허망함이 서려 있었다. 평생을 '나다움'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온 자의 처절한 고립감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과거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라면 결코 섞일 수 없었을 두 평행선이었다. 한 사람은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서, 다른 한 사람은 차가운 지성의 변방에서 서로를 경멸하거나 무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계급도, 학력도, 취향도 아니었다. 오직 생존이라는 본능과,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지독한 외로움뿐이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나요?"
A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B는 대답 대신 자신의 마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우주의 진리를 받아적는다고 믿었던 그 손은, 이제 그저 온기를 갈구하며 경련하는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었다.
"남아 있는 건..."
B가 낮게 읊조렸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뿐이네요."
그 순간, B는 자신의 갑옷을 스스로 풀었다. 그리고 A는 자신의 찢어진 정장을 바닥에 던졌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가상의 경계선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A는 외부적인 것들에 자신을 맡겼기에 세상이 무너졌을 때 영혼이 찢겼고, B는 내부적인 것들에 자신을 가두었기에 세상이 무너졌을 때 존재가 증발했다. 하지만 그 박락의 고통 끝에서 만난 진실은 같았다. 가죽을 벗긴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붉은 피를 흘리며, 똑같이 체온을 그리워하는 존재라는거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중력에 이끌리듯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내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hug
그것은 이 이야기가 도달할 수 있는 뻔하고 유일하고도 가장 치열한 마침표였다.
A의 뺨에 B의 거친 숨결이 닿았다. B의 가슴팍에 A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도, 철학적인 은유도 아니었다. 살과 살이 맞닿는 물리적인 압박, 심장과 심장이 마주 보는 생물학적인 공존이었다.
포옹하는 순간, A는 깨달았다. 타인의 박수 소리보다 더 확실한 존재의 증명은, 지금 내 어깨를 누르는 이 낯선 이의 체중이라는 것을. B역시 깨달았다. 고고한 고독보다 더 위대한 진리는, 지금 내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이 생명의 박동이라는 것을.
그들의 포옹 속에서 의미는 재정의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치도, 나를 증명하기 위한 고집도 아니었다. 그저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서로의 온기로 확인해주는 행위. 가죽이 다 타버린 자리에서 시작되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숭고한 소통이었다.
광장 위로 밤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놓지 않았다.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의 실루엣은 이제 A도, B도 아니었다. 그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를 보듬는, 지구라는 행성에 남겨진 가냘픈 불꽃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