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빛은 겨울의 날카로움을 벗어던지고, 여름의 강렬함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그 중간에 있습니다. 이 중간의 나른함은 사진 속 구도와 묘하게 공명합니다. 흰 벽의 압도적인 면적, 검은 철문의 간결한 존재감, 그리고 녹색 잔디의 생동감 있는 선들이 만들어내는 비율은 삼청동의 일상이 만들어낸 우연한 조화입니다.
삼청동을 거닐다 마주친 이 순간에서, 저는 갤러리 안에서 경험한 수많은 작품들보다 더 강렬한 미적 체험을 느낍니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요소들의 우연한 만남이 가장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요. 전시회 사이의 짧은 휴식, 한 갤러리에서 다른 갤러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포착한 이 이미지는 삼청동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다층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목적지 사이의 '사이 공간'에 대한 기록이면서, 예술 감상의 전과 후를 잇는 전환의 순간에 대한 기념비입니다. 삼청동의 봄날, 갤러리 투어의 피로가 잠시 내려앉은 그 찰나에, 일상의 풍경은 스스로를 예술로 변모시켰습니다. 그것은 관람객으로서가 아닌, 발견자로서의 특권적 순간입니다.
회색 콘크리트 벽, 검은 직사각형 철문, 그리고 생생한 녹색 잔디. 이 세 가지 요소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삼청동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이 지역의 특성이 한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벽면의 흰색은 완벽한 백색이 아닙니다. 시간이 만들어낸 미세한 흔적들, 빗물의 자국, 햇빛에 의한 변색이 만들어낸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층위들이 쌓여 있습니다. 검은 철문은 현대적인 디자인 요소로, 그 형태는 삼청동의 갤러리들이 갖는 미니멀한 미학을 대변합니다. 검은색의 깊이는 내부 공간으로의 초대장 같은 역할을 하며, 미지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녹색 잔디는 봄의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잔디 하나하나의 방향성은 무질서하면서도 일종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마치 갤러리에서 갤러리로 이동하는 저희들의 자유로운 동선과도 닮아 있습니다.
벽과 잔디와 검은 구조물. 이 세 요소가 만들어내는 침묵 속에서, 저는 삼청동의 봄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경험합니다. 전시회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결국 발견한 것은 프레임 바깥의 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