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 강의가 마무리 된 지금,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오늘은 조금 역설적이지만 사진을 하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같이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저번 강의에서 말씀드렸던 ’선택과 배제‘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어느 것이나 다 된다면 실상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If anything goes, then nothing goes)’라는 말입니다. 처음 들으면 말장난 같기도 하고, 조금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사진은 물론이고 모든 예술,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의미를 만들고 소통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명제를 곱씹어보면, 절대적인 자유가 오히려 의미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역설이 보입니다.
무중력 상태를 상상해보세요.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고, 위도 아래도 없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그 공간에서 우리는 정작 어디로도 가야할지 난감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향이 동등하게 가능하다는 것은, 어떤 방향도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니까요.
예술에서, 특히 사진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선택과 배제 없이 예술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평가와 구별의 기준이 없다면 미학적 가치는 어떻게 생성될까요? 모든 이미지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때, 사진의 메시지는 어떻게 전달될까요?
기호학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의미는 관계와 차이를 통해 발생한다’입니다. 소쉬르가 밝혀낸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원리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빨간 신호등이 ‘정지’를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정지’라는 속성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녹색(진행)이나 주황색(주의)이 ‘아니기’ 때문이죠. 즉, 다른 것들과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이 만들어내는 체계 안에서의 위치가 의미를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체계가 작동하려면 규칙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연결은 자의적이지만, 일단 사회적 약속을 통해 정해지면 안정적으로 기능합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나 다 된다’는 상황은 바로 이 체계, 이 코드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킵니다.
빨간색이 ‘정지’도 되고, ‘진행’도 되고, ‘사랑’도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빨간색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안정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기호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냥 색깔 자체로만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 )을 먹는다’라는 문장에서 괄호 안에는 밥, 빵, 사과처럼 음식에 속하는 단어들이 들어가면 의미가 통합니다. 만약 이 자리에 의자, 하늘, 슬픔처럼 아무거나 다 들어갈 수 있다면, 이 문장은 소통의 도구로서 기능을 잃는 것이죠.
이것을 사진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실의 객관적 기록’이라는 강력한 코드 위에서 작동합니다. 우리가 다큐멘터리 사진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구나’라고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이 코드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토샵으로 정교하게 합성된 이미지를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AI가 생성한 가상 인물의 사진을 역사적 인물의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모두 ‘다큐멘터리’로 용인된다면, 그순간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장르의 기호적 코드는 무너지게됩니다. 그 이름은 더 이상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의미, 즉 실재성과 기록성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다면, 결국 다큐멘터리라는 말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모순이 되는 것이죠.
사진 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얕은 심도로 배경을 흐리게 만드는 아웃포커싱 기법은 ‘주제에 대한 집중’이나 ‘몽환적 분위기’라는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로 기능해 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진이 아웃포커싱이거나, 혹은 아무런 의도 없이 무작위로 사용된다면 이 기법은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생성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그저 배경이 흐린 사진일 뿐입니다. 모든 기법이 동등하게, 아무렇게나 사용될 수 있다면, 어떤 기법도 특별한 미학적, 의미론적 효과를 낳지 못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백색소음 같은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미학은 결국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진의 미학적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작가의 ‘선택’과 ‘결단, 배제’를 통해 부여된 ‘형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합니다. 눈을 뜨는 순간마다 수천, 수만 가지의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사진가는 그 무한한 현실에서 특정 프레임, 특정 순간, 특정 빛을 ‘선택’하고 나머지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미학적 의도를 드러냅니다. 바로 이 선택의 행위, 이 결단이 사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어느 것이나 다 된다’는 태도는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과 형식의 구속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형식이나 구조가 부재한 상태이고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정하면,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할 기준 자체가 사라집니다.
잘 찍은 사진과 못 찍은 사진의 구별이 불가능해집니다. 의도가 담긴 사진과 우연히 찍힌 사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논하고, 무엇에 감동받을 수 있을까요? 그저 무한한 이미지의 나열만 있을 뿐인데 말이죠.
작가의 스타일이나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 선택의 합입니다. 무엇을 찍고, 어떻게 찍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에 대한 일관된 선택들이 쌓여서 그 사람만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죠.
요즘 AI 이미지 생성 기술을 보면서 위에서 말한 명제가 얼마나 정확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프롬프트에 그냥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라고만 입력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기술적으로는 훌륭해 보이지만, 개성도 없고 감동도 없는 진부한 이미지가 쏟아집니다. ‘아무 풍경이나 다 괜찮다’는 식의 접근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코닥 필름의 질감으로, 늦은 오후의 사광을 받으며 서 있는 제주도의 외로운 현무암과 거친 파도를 미니멀리즘 구도로 담아낸, 안셀 아담스 스타일의 고대비 흑백 사진‘이라고 구체적인 제약과 선택을 담은 프롬프트는 비로소 독창적이고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높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제약과 규칙이 창의성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와 가치를 생성하는 필수 조건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AI 시대에 우리 사진가들의 고유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한에 가까운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AI에게 ‘어느 것이나 다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명확한 비전과 제약을 제시해서 AI를 자신의 미학을 구현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능력. 그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다 된다면, 실상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결국 이 명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 의미는 차이에서 나온다.
- 가치는 선택에서 나온다.
-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다.
- 우리는 제약을 통해 자유로워지고, 선택을 통해 의미를 만들며, 배제를 통해 가치를 창조한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 때,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할 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길 바랍니다.
-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가?
- 그리고 그 선택은 어떤 의미를 만들고 있는가?
‘어느 것이나 다 된다’는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와 창의성은 그 반대편에, 즉 용기 있는 선택과 명확한 제약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것이 우리를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언가’로 만들어 주는 유일한 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