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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왕자 aka C FLOW Aug 26. 2017

미담사례로 비춰진 아름다운 사람들

공적영역에서 바라본 나만의 속 사정

"주말 아침"


아침부터 속이 매스껍다.

어제 새벽에 먹은 누룽지 과자가 이제야 뱃속에서 불고 있나보다.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서라도 토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한 아침. 산책길 헛구역질 하다 이웃주민을 만났다.


"어디서 많이 뵌분 것 같은데"

-"넵, 안녕하세요. 속사포 랩퍼 엄지왕자 최.."

"아닌가, 죄송합니다."


-"이런..."

추해보이는 나의 헛기침이 하천길까지 메아리 친다.


어지러움이 심해지면서 이마에 땀이 맺힐때 쯤, 다시 집에 가고 싶어졌지만 내려가고 싶지 않다.

휠체어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내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짓누른다.

휠체어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내 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일것이다.


화장실의 문턱도 손으로 짚어야 되고, 문고리를 잡고 서는순간 다시 엉덩이와 접촉되는 불결한 변기를 만지며 용변을 보게 되는 주말 일상, 내 손은 늘 불결하다. 그 손으로 지성이를 안고, 볼을 만지며 놀아줄 생각하니 몇번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다.

"아빠, 아빠, 어디 갔다왔어? 한참 찾았잖아, 정말 이러기야?"


5살이 된 아들과의 대화는 삶의 활력을 준다. 인간의 언어는 참으로 신기하다. 옹알이 하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나와 비슷한 단어를 조합해서 대화를 시도하려는 모습이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14살부터 내 의지와 다르게 장애인과 섞여 살았던 삶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언어를 잘 알아듣는 눈이생겼고, 귀가생겼고, 입이생겼던 것 같다.


그러다 사회에 나왔을때의 나란, 그 신체부위들이 다시금 정렬되고 맞춰가는 과정이 되버린 것이다. 이른바 일상적 자립생활로써 나만의 생존법을 위해 새롭게 배워나갔던 "보고, 듣고, 먹고"하는 의식주가 변했다. 그 무렵 좋은 사람들을 만나 경제적 자립을 했고, 결혼을 했다.


장애를 극복한 지체장애 2급, 나는 정말 무엇을 극복했는가?


나는 방송에서 늘"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 보통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왔다. 방송은 나의 삶을 자기극복의 미담으로 공유되어왔다.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미담이 나를 키워준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지 현실은 미담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마치 연예인들이 스포트라이트 받고, 집에서 고독함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 같다.


나는 왜 따옴표 속 질문으로만 존재하고 그 질문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객관화 시켜 들여다본, 삶의 좌표를 확인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생존과정에서 해답을 얻지 못할까.


자기극복 미담으로...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너무 집중할 때 현실적인 부조리에 눈 감아 버릴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버틸 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보는 시사다큐나 뉴스에서 나오는 극악무도한 사건들만 봤을때의 기분이 하루종일 유지 되지 않고자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보고자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이 자기 극복 미담으로,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보여지기 보다 현실 속에서 억압되고, 궁금해도 답해지주 않는 질문에 대해 가감없이 던져지는 것, 혹은 날것으로 보여지는 것에 있어서 거부감을 가져야 할까. 나조차도 휠체어에서 내리기 싫어하면서 누군가에게 휠체어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왜 시설 밖으로 나왔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하는 이 시대 갓 태어난 탈시설 장애인과 달리 이미 보편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며 TV앞에서 랩하는 나의 모습에서 왜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일까.


보편적인 삶에서 누리고자 하는 것들 때문에, 혹은 경제적 자립이 주는 나태함 때문일까.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이 곧 자기극복 미담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는 나만의 한계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름 최충일.

집에서는 "아빠, 남편,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선생님",
무대위에선 "엄지왕자",
친구들은 "쪼까니"(키가 작아서)라 부른다.

그리고 지체2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호칭과 별명을 갖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내게
호칭도 별명도 될수 없는 단어다.

어릴때 동네 꼬마들이 놀릴때 빼고는...
평소 사람들이 "장애인 안녕?"
이라고 한적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단어는 나의 삶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불려지는
어색한 "middle name"이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졸업,
대학생활 힙합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한다.
직장이 있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었다.

삶의 행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다.

장애인이 아닌 아빠, 남편, 래퍼, 직장인, 아들로써...
삶의 다양성과 일상을 타이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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