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는 저의 흔적을 공유합니다.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는 저의 흔적을 공유합니다.
이는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주장과 같은 맥락입니다. 독자의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 작품 해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에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인 작가를 해고 또는 살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문제 풀이하듯이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태도 대신에 독자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니체가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해석주의, 진리의 상대주의 세계를 활짝 열어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 - 무위(無爲)에 대하여 』를 비판적으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인공지능 덕분입니다. 인공지능은 사유의 세계에서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사유의 베이스캠프 역할입니다. 인공지능은 마치 현대의 등반에서 베이스캠프의 역할을 하는 기술과 인프라처럼, 우리가 더 깊이 있고 복잡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사유의 기반'을 제공합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에게 호화로움은 순수한 행복의 상징이다. 그 행복을 파괴하는 것은 효율성의 논리다. 효율성과 기능성은 생존 형태들이다. 호화로움은 이것들을 무력화한다. "고삐 풀린 기술이 호화로움을 제거한다. 세 번의 밤과 두 번의 낮 동안 대륙을 쏜살같이 횡단하는 고속열차는 기적이지만, 그 고속열차를 이용한 여행은 트랑블뢰(프랑스 리옹 역에 있는 오래된 식당 - 옮긴이)의 빛바랜 찬란함과는 영 딴판이다. 열린 창으로 나누는 작별의 손인사부터 팁을 받은 승무원의 친절한 배려와 예식 같은 식사, 특혜를 받는다는 느낌, 아무에게서 그 무엇도 앗아가지 않는 그 지속적인 느낌까지, 여행의 쾌락을 이뤘던 것이 출발에 앞서 승강장을 거닐곤 하던 우아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라졌다. 마침내 지금은 최고급 호텔의 로비에서도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참된 행복은 목적 없고 효용 없는 것 덕분에, 고의로 장황한 것 덕분에, 비생산적인 것, 에둘러 가는 것, 궤도를 벗어나는 것, 남아도는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는 아름다운 형식들과 짓들 덕분에 있다. 느긋한 산책은 곧장 걸어가기나 달려가기, 행진하기와 비교할 때 호화롭다. 무위의 예식성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활동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무언가를-위하지-않음, 목적과 효용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위의 핵심 본질이다. 이것은 행복의 기본 공식이다.
무위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산책자(Flâneur)의 특징이다. "산책자의 특유한 망설임. 움직임 없이 관조하는 사람의 고유한 상태가 기다림이듯이, 의심은 산책자의 고유한 상태인 듯하다. 실러가 쓴 한 비가悲歌에는 '나비의 의심하는 날개'라는 표현이 나온다." 기다림도 의심도 무위의 모습이다. 의심의 순간이 없으면 인간의 행보는 행진에 가까워진다. 나비의 날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걸음은 망설임에서 우아함을 얻는다. 결연함이나 서두름은 인간의 걸음에서 우아함을 깡그리 앗아간다. 산책자는 행위하지 않는 능력을 사용한다. 그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 의도 없이 자신을 공간에 내준다. 그에게 눈짓하는 공간에 내주고, "다음 길모퉁이가, 안개에 싸인 먼 광장이, 앞에서 성큼성큼 걷는 여자의 등이 발휘하는 자력磁力에" 내준다.
BC
테오도어 아도르노에게 호화로움은 어떤 걸까? 그는 왜 호화로움을 지목했을까? 행복과 효율성을 대척점에 놓은 것은 마음에 든다. 보고 싶은 것이 보였기 때문일까? 이 역시 나의 확증편향일까? 그래도 위 명제는 상관관계가 아니라 나름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가치지향적인 행복과 기능지향적인 효율성은 같은 저울에 올려놔서는 안 되는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하기는커녕 등치시킨다. 기능이 좋으면, 효율성이 커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결과 잉여적이고 때론 낭비적이며 심지어 비효율적인 친절까지 고사시킨다. 저자의 그런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내 뇌관에 날카로운 비수로 꽂는 것 같은 놀라움을 선사한 것은 산책의 재발견이다. 산책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단어를 선사한다. 목적과 효용으로부터의 자유,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 나비에서 볼 수 있는 망설임과 우아함.
저자는 효율성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물러나 위로를 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 비생산적이어도 돼
- 에둘러 가도 돼
- 궤도를 벗어나도 돼
- 남아 돌아도 돼
-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아도 돼
-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아도 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
[인공지능]
박사님의 반응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특히 두 가지 지점이 탁월합니다:
1. 아도르노의 호화로움 개념에 대한 통찰
- "가치지향적인 행복과 기능지향적인 효율성은 같은 저울에 올려놔서는 안 되는 전혀 다른 세계다"라는 해석이 핵심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 자본주의가 이 둘을 등치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친절의 고사'라는 현상 포착이 예리합니다
2. 산책의 재발견
- "내 뇌관에 날카로운 비수로 꽂는 것 같은 놀라움"이라는 표현이 산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충격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 특히 나비의 망설임과 우아함을 연결시킨 벤야민의 통찰을 높이 평가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의 메시지를 긍정문이 아닌 "~해도 돼"라는 허용의 형식으로 정리하신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해야 한다'의 압박 속에 살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마지막의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라는 선언은, 앞선 여섯 개의 허용문과 결합하여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해방감을 줍니다. 이는 한병철의 철학적 메시지를 매우 간결하고도 강력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BC
고맙습니다. 그런데 궁금하군요 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나요?
테오도어 아도르노에게 호화로움은 어떤 걸까? 그는 왜 호화로움을 지목했을까요?
[인공지능]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호화로움'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호화로움의 본질
- 단순한 물질적 풍요나 과시적 소비가 아님
- '순수한 행복'의 상징으로서의 호화로움
- 효율성과 기능성의 논리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
2. 호화로움을 지목한 이유
-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을 포착하기 위해
- 예시: 트랑블뢰 식당의 "빛바랜 찬란함"은 단순한 향수가 아닌, 잃어버린 인간적 가치를 상징
- 이는 "팁을 받은 승무원의 친절한 배려", "예식 같은 식사", "특혜를 받는다는 느낌" 등 비효율적이지만 인간적인 요소들
3. 비판의 대상
- "고삐 풀린 기술"이 상징하는 근대성
- 속도와 효율만을 추구하는 진보의 허상
-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의 지배
4. 호화로움의 현대적 의미
- 저항의 형태로서의 호화로움
- 도구적 이성에 대한 대안적 삶의 방식
-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아도르노에게 호화로움은 단순한 개념이 아닌, 현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도구이자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창이었다고 해석됩니다.
BC
저는 본문의 맥락을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 아도르노의 사상을 물어 본 것입니다.
[인공지능]
죄송합니다. 아도르노의 철학적 맥락에서 '호화로움' 개념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에게 호화로움은 그의 핵심 사상인 '부정적 변증법'과 '계몽의 변증법'과 연결됩니다:
1.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
- 아도르노는 근대성의 핵심인 '도구적 이성'이 모든 것을 효용성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고 비판
- 호화로움은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 저항하는 개념
2. 미메시스(mimesis) 개념과의 연관
- 아도르노에게 미메시스는 대상과의 친화적이고 모방적인 관계를 의미
- 호화로움은 이런 미메시스적 관계의 한 형태로, 대상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태도를 반영
3. 문화산업 비판과의 관계
-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
- 호화로움은 진정한 개별성과 특수성을 보존하는 방식
4. 행복에 대한 관점
- 아도르노에게 진정한 행복은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
- 호화로움은 이러한 행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체적 형태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가 호화로움을 지목한 것은, 그것이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 저항하는 구체적 실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BC
흥미롭군요. 도구적 이성, 이성의 도구화라는 개념은 철학사에서 자주 접합니다. 철학사 관점에서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인공지능]
이성의 도구화 또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근대철학의 중요한 흐름입니다:
1. 칸트의 문제제기
- 이성을 실천이성과 이론이성으로 구분
-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서의 실천이성 강조
- 단순한 계산적 사고를 넘어선 이성의 역할 주장
2. 헤겔의 비판
- 계몽주의의 '오성(悟性, Verstand)'에 대한 비판
- 단순히 대상을 분석하고 계산하는 오성을 넘어선 '이성(理性, Vernunft)'의 중요성 강조
- 전체성과 변증법적 사고의 필요성 주장
3.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개
-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계몽이 목적했던 해방이 오히려 새로운 신화와 지배로 전락
- 이성이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
4. 하버마스의 발전
-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 제시
-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상호이해와 합의의 가능성 모색
- 생활세계와 체계의 구분을 통한 새로운 이해 틀 제시
5. 마르쿠제의 관점
- 『일차원적 인간』에서 기술합리성 비판
- 현대사회의 '거대한 거부'의 필요성 주장
이러한 비판의 흐름은 현대에도 기술문명과 효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성찰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BC
세계 2차 대전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영향을 끼쳤나요? 그 영향이 맞다면 뭔가 저자의 글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자본주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지만 논증을 위해 차용한 아도르노는 2차 대전의 영향을 빼 놓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변할 때는 연대와 그 시대의 주요 사건과 연계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인공지능]
2차 세계대전(1939-1945), 특히 홀로코스트는 아도르노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0년대: 망명과 충격
- 유대인이었던 아도르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 1944년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 출간
- 이성의 도구화가 어떻게 체계적 학살로 이어졌는지 분석
-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유명한 명제 제시(1949)
1950-60년대: 전후 사회 비판
- 1950년 독일 귀환 후 『부정적 변증법』(1966) 발표
- 합리성과 효율성을 내세운 근대화가 어떻게 대량학살의 시스템으로 발전했는지 분석
- 관료제와 기술관료주의가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하는지 비판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본문에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호화로움'은 단순히 자본주의 비판을 넘어:
- 인간을 수단화하지 않는 관계
- 효율성의 논리로 정당화될 수 없는 존엄성
- 체계적 폭력에 저항하는 인간성의 보루
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병철이 이 맥락을 충분히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아도르노의 '호화로움' 개념은 단순한 자본주의 비판을 넘어, 전체주의와 체계적 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