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는 저의 흔적을 공유합니다.
이는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주장과 같은 맥락입니다. 독자의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 작품 해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에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인 작가를 해고 또는 살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문제 풀이하듯이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태도 대신에 독자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니체가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해석주의, 진리의 상대주의 세계를 활짝 열어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 - 무위(無爲)에 대하여 』를 비판적으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인공지능 덕분입니다. 인공지능은 사유의 세계에서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사유의 베이스캠프 역할입니다. 인공지능은 마치 현대의 등반에서 베이스캠프의 역할을 하는 기술과 인프라처럼, 우리가 더 깊이 있고 복잡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사유의 기반'을 제공합니다.
축제는 '위하여'로부터, 목적과 효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과 맞선다. 노동은 그것들에 예속되어 있다. '위하여'로부터의 해방은 인간의 실존에 축제성과 찬란함을 부여한다. 예컨대 걸음이 '위하여'로부터, 목표를 향해 걸어가기로부터 해방되면 춤으로 바뀐다. "춤이란 다름 아니라 몸이 실용적인 일들로부터 해방되기, 철저히 무위하면서 몸짓을 내보이기가 아니겠는가?"
'위하여'로부터 해방되면 움켜쥐지 않는다. 손은 논다. 혹은 손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순수한 손짓을 이룬다. 실용적인 일들로부터 해방된 불은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불은 무위의 매체가 된다. "인간이 최초로 마주한 몽환적 대상, 쉼의 상징, 휴식으로의 초대는 의심할 바 없이 화덕에 둘러싸인 불이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불 앞에서 몽상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이 가진 참으로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의미를 망각하는 짓이다."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양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에서만 불의 혜택이 실감된다. 그 자세는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아이는 불가에서 완전히 자동으로 그 자세를 취한다. 또한 그 자세가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그 자세는 경비원이나 감시자의 경계심과 전혀 다른, 아주 특별한 주의를 담고 있다. "불가에서 사람은 편히 앉아 쉬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불은 실행과 행위를 향한 프로메테우스적 파토스(Pathos)와 연관 지어진다. 반면에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정신분석은 불의 관조적 차원을 발굴한다. 인간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불 앞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취하는 자세는 인간이 지닌, 까마득히 오래된 관조 성향을 생생히 보여준다. 관조적 무위는 생각하는 사람을 경비원이나 감시자로부터 구별되게 만든다. 경비원이나 감시자는 항상 구체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반면에 생각하는 사람은 의도가 없다. 눈앞에 둔 목표가 없다.
BC
어쩔 수 없이 한병철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성의 도구화가 가져온 끔찍한 결과를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통해 당시 지성인들이 매우 성실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당시에 이성의 대명사로 받아들인 합리성과 효율성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과연 그도 한병철만큼 효율성을 정면에서 대놓고 비판했을까?
한병철의 비판은 그의 말마따나 호화롭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대한 날선 비판의 극단은 어디일까? 흥미롭다. 한병철은 의도·목적이 없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독자를 몰아세운다. 손의 기능(의도)에서 해방될 때 손은 춤을 출 수 있게 되고, 불이 자신의 기능에서 해방될 때 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의도·목적·기능·효용에서 미끄러졌을 때 쉼이 있고 호화로워지며 공동체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한병철의 글은 충격 요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경도된 현대인을 중용의 위치에 서게 하려면 같은 무게를 저울의 정반대편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효율성을 폐기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시스템 관점에서는 효율성 그 자체를 좋고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관조의 삶을 잘 영위하려면 관조의 삶을 효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인공 지능]
박사님의 분석이 매우 날카롭습니다. 특히 세 가지 중요한 지점을 짚어주셨네요:
1.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연속성과 차이
- 한병철과 아도르노는 모두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지만
- 아도르노의 경우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참상에서 비롯된 깊은 문명 비판
- 반면 한병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 폭력에 초점
2. 한병철의 '충격 요법'에 대한 통찰
- "저울의 정반대편에 같은 무게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탁월합니다
- 이는 수사학적 전략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 현실적 해결책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
3. 시스템 관점에서의 문제 제기
- "효율성 그 자체를 좋고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지적이 핵심적입니다
- "관조의 삶을 효율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제안은 매우 현실적
- 이는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선 통합적 관점의 가능성을 시사
특히 마지막 문장은 한병철 논의의 한계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탁월한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