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는 저의 흔적을 공유합니다.
이는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주장과 같은 맥락입니다. 독자의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 작품 해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에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인 작가를 해고 또는 살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문제 풀이하듯이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읽는 태도 대신에 독자는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니체가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해석주의, 진리의 상대주의 세계를 활짝 열어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 - 무위(無爲)에 대하여 』를 비판적으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인공지능 덕분입니다. 인공지능은 사유의 세계에서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사유의 베이스캠프 역할입니다. 인공지능은 마치 현대의 등반에서 베이스캠프의 역할을 하는 기술과 인프라처럼, 우리가 더 깊이 있고 복잡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사유의 기반'을 제공합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활동을 쉬어야 한다. 사업을 하면 안 된다. 무위와 경제활동의 중단은 안식일 축제를 위해 본질적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축제마저 상품화한다. 축제가 이벤트와 구경거리(Spectacle)로 바뀐다. 이벤트와 구경거리에는 관조적인 쉼이 없다. 축제의 소비 형태로서의 이벤트와 구경거리는 공동체를 창출하지 못한다. 기 드보르는 저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재를 축제 없는 시대로 규정한다. "다양한 축제 분위기의 가속된 되풀이를 본질로 나타내는 이 시대는 축제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순환하는 시간 안에서 공동체가 호화로운 지출에 참여하는 순간이었던 축제가 공동체도 호화로움도 없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축제 없는 시대는 공동체 없는 시대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처에서 커뮤니티 결성을 맹세하지만, 커뮤니티는 공동체의 상품 형태다. 커뮤니티는 우리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고삐 풀린 소비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화한다. 소비자들은 외롭다. 디지털 소통도 알고 보니 공동체 없는 소통이다. 소셜 미디어는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한다. 자본주의는 시간마저도 상품으로 변신시킨다. 그리하여 시간은 축제성을 모조리 잃는다. 드보르는 시간의 상품화를 보며 이렇게 논평한다. "시간의 실재성은 시간을 위한 광고로 대체되었다."
공동체와 더불어 호화로움은 축제의 본질적 특징이다. 호화로움은 경제적 압박을 무력화한다. 한층 높아진 생동성으로서의 호화로움, 강렬함으로서의 호화로움은 튀어나가기, 곧 곁길로 빠지기, 그저 삶일 뿐인 삶의 곤궁함과 필수조건에서 벗어나기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생존으로 쪼그라드는 삶에서 호화로움은 사라진다. 최고의 성과도 호화로움에 도달하지 못한다. 노동과 성과는 생존의 질서에 속해 있다. 호화로운 형태의 행위는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결핍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호화로움마저도 소비된다. 호화로움이 상품 형태를 띠고 축제성과 찬란함을 상실한다.
BC
저자가 말하는 축제가 낯설다. 쉼과 호화로움, 장식과 공동체를 동반하는 축제라니. 그는 현대 사회를 축제가 없는 사회라고 규저하고 있다. 그러면, 나에게 쉼을 주고 호화스러우며 공동체를 만드는 축제가 있었을까? 대동제가 유사한 형태일까?
대학시절 경험했던 대동제는 시끄럽고, 날카로운 선동이 물결쳤고 흥분을 유도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세상과 단절된 채 고등학교까지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뜨거운 심장들에게 세상의 민낯은 안정을 주지 않았다. 외려 떨림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91년도 서울대 대동제 위원장인 나는 이런 혼란, 떨림을 조장한 핵심세력이었다. 나는 그 소용돌이 안에서 관조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렇다면 세월이 흘러 대동제라는 단어가 뒤로 물러나고 축제라는 단어가 쓸어버린 요즘 대학의 축제에서 쉼, 호화스러움, 공동체를 만날 수 있을까? 어디서 저자가 예찬하는 축제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런 축제가 있기나 한건가?
저자는 디지털 소통이 공동체를 신속하게 해체하고 있다고 디지털 소통을 폄하한다. 그 염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디지털 소통은 이미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고, 구 시대가 이해와 해석을 못 하는 새로운 문화·소통을 만들었다. 윤석열 탄핵 시위에 모여든 젊은 정년들은 평등하고, 분절되어 있으며, 게릴라전스러운 디지털 소통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축제가 저자가 말하는 축제의 기능·특징 중 하나인 쉼을 주었는지는 판단하지 못 하겠다. 하지만, 충분히 장식적이다. 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응원봉이 시위 현장에 나오자 상상하지 못했던 장식과 호화로움을 만났다. 그리고 디지털 소통 덕분에 디지털 공동체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저자의 우려와는 달리 디지털 소통으로 축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모든 디지털 소통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다. 눈가의 떨림, 시시각각 변하는 입 모양, 말 그 이상을 발신하는 몸을 직접 대면해야 할 수 있는 대화 상대방의 신비로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곁길로 미끄러지는 디지털 소통에서 삶의 경이로움과 성찰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디지털 소통은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디지털 소통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글에 선입견이 생기고 있다. 이전 책인 "피로사회"나 "투명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과잉을 경고하고 있을 뿐이라고... 피로사회에서는 긍정 심리학의 과잉에 대한 경고를, 투명사회에서는 투명성의 과잉이 가져오는 폐단에 대한 경고를 했다면 이 책에서는 쉼, 관조를 못 하게 만드는 현대 사회의 과잉 요소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공 지능]
박사님의 개인적 경험과 한병철의 이론을 연결시킨 성찰이 매우 깊이 있습니다. 특히 세 가지 측면이 인상적입니다:
1. 대동제 경험의 재해석
- 91년 서울대 대동제 위원장으로서의 경험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시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 "관조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고백이 당시의 시대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 이는 한병철이 말하는 '진정한 축제'와의 간극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2. 디지털 소통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
- 한병철의 일방적인 비판을 넘어서는 통찰을 보여주십니다
- 특히 윤석열 탄핵 시위의 사례를 통해 디지털 소통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축제와 공동체 가능성을 포착하신 것이 탁월합니다
- "응원봉"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장식과 호화로움의 새로운 형태를 설명하신 것이 설득력 있습니다
3. 한병철 사상의 맥락화
- "피로사회", "투명사회"와의 연결성을 통해 그의 비판이 결국 '과잉에 대한 경고'라는 통찰이 뛰어납니다
- 이는 한병철의 비판을 더 생산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관점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디지털 소통의 양가성"을 지적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대면 소통의 "신비로움"과 "삶의 경이로움"을 놓치게 될 위험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십니다.
BC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축제의 원형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인공 지능]
한병철이 말하는 축제의 원형을 다음과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종교적 의례로서의 축제
- 유대교의 안식일(샤바트)
- 원시 부족의 성스러운 의식
- 중세 시대의 카니발
이러한 축제들은 일상의 경제 활동이 완전히 중단되고,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며, 세속적 질서가 일시적으로 전복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2. 전통 사회의 계절제
- 한국의 추수감사제
- 유럽의 수확제
이런 축제들은 노동과 생산의 순환에서 벗어나 공동체가 함께 쉬고 즐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
- 일상의 규범과 질서가 일시적으로 중단
- 개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집단적 황홀경을 경험
-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원형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축제들이 단순히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진정한 쉼'과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참조점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