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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스 Sep 05. 2021

[책]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그 시절의 나의 감정을 떠올려보자

 

 정세랑 작가를 떠올리면 작가의 이름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느낌이 있다.(본명인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넷플릭스에서 반영된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메인 포스터에서 배우 정유미의 짜증은 나지만 씩씩해 보이는 표정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사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책도 드라마도 보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정세랑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고 「이만큼 가까이」도 도서관에서 책을 둘러보던 중 정세랑이란 이름을 보고 집어 들었다. 책 제목부터 하이틴 재질이라 밝고 경쾌할 꺼라 생각했는데,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잿빛 구름이 소설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는 내내 언제 등장인물들에게 폭우가 쏟아질지 몰라 조심조심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현재 30대인 화자와 친구들이다. 직장이나 연애, 가족관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이들의 현재의 삶과 십 대 시절인 90년대를 번갈아 보여준다.

 소설을 읽으며 나도 잠시나마 90년대를 회상했다. 화자가 즐겨 입던 해골무늬 티셔츠는 주변에 록 음악 좋아하는 친구 한 두 명은 꼭 입었던 같다.(물론 화자가 가장 좋아했던 해골무늬 패션은 스타킹인데.. 그건 조금 생소했다). 소설 속에서 90년대 아이돌이 엑스트라로 잠시 등장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아이돌과는 사뭇 다른 세기말 아이돌 느낌이 있다. 화자의 친구 중 한 명인 송이가 반했던 ‘포대 자루 같은 비닐 옷을 입고 분수 같은 머리를 한 아이돌’에게 우리들은 한 때 미쳐있었고, 그들은 범접할 수 없는 우상이었다. 그 시절 영화관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극장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우리가 다니던 영화관은 한 군데였다. 당시까지 단관이었던 일산 최초의 영화관 나운시네마였다. 멀티플렉스란 말을 몰랐을 때다. 영화를 고르는 게 아니라 그저 다니는 극장이 있던 때였다.


 극장에서 영화 한 편만을 사 와서 그 영화만 하루 종일 틀어주는 시절이어서 ‘나’와 주완이는 토이스토리를 보기 위해 롯데시네마가 아닌 나운시네마를 가야 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그 시절 파주에서의 생활은 약간은 불편하고 촌스러울지라도 소설 속 화자 ‘나’에게는 생명력이 있는 땅이었고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어가는 공간이었다.       


 소설에서 90년대라는 배경 다음으로 소설 속 인물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모두 개성도 강하고, 집안 환경이 남다르긴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실제로도 비슷한 캐릭터들이 학교나 학원에 분명 한두 명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강력한 모계사회에서 자란 송이는 두발 단속을 하는 학생주임에게 신발을 던지는 당돌한 아이지만 반 여자애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통통하고 피부가 유난히 분홍빛을 띠어서 아이들이 새끼돼지라고 놀렸던 찬겸이는 평소에 주변일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으며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는 스타일도 아니다. 엄마의 방관과 외삼촌의 폭력에 길들여진 수미는 가족이라고 해서 꼭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민웅의 말에 해방감을 느끼고 가족에게 느껴야 할 모든 사랑을 민웅이에게 쏟는 아이이다. 그런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민웅이는 수미를 거절도 수락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어른스럽지만 얄미운 아이이고, 주연이는 집 창고에는 저장식품이 가득하지만 요리를 배우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밥에 치토스를 꽂아먹으며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픈 손가락 주완이까지.

 물론 나의 십 대 시절의 친구들의 성격이 더 극단적으로 뻗어나가야만 소설 속 캐릭터들과 비슷해지겠지만 10대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예민함, 나약함과 불안감은 내 친구들도 누구에게 뒤지는 편이 아니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상처를 받는 동시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개성 강한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망할 버스’였다. 이 버스는 일반적으로 십 대들이 통학할 때 타는 노란색 스쿨버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 버스를 빼놓고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한 시간에 한 대, 그 버스가 신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우리 여섯 명은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지 않으면 매일 그 버스에 탔다. 누구 하나 타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 말도 안 되는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는 덜컹거리는 2번 버스 안에서 이들은 저절로 동지가 되어 유대감을 느낀다. 그러나 십 대 시절에는 친구와의 관계가 영원할 수 없으며 특히 남녀관계라면 더더욱이나. 민웅이가 여친이 생긴 뒤로 항상 민웅이 옆자리 고정이었던 수미는 버스 안에서도 더 승차감이 엉망인 맨 뒷자리로 자리를 옮겼고, 송이는 묵묵히 수미의 옆자리에 앉아주었다. ‘나’와 주연이도 그 둘을 위해 한 칸 더 뒤로 가서 앉았다. 비 오는 날 창고에서의 일로 수미와 민웅이의 관계가 최악으로 변한 후 버스에서는 모두가 모두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듣기 싫은 음악들만 서로 섞였다.

 이 아이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와 버스의 자리 위치는 항상 정비례한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그때 그 시절을 아련히 떠올리는 현대인들에게 추억을 헌정하는 소설이다. 꼬박꼬박 챙겨보았던 응답하라 시리즈나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았을 때 마음 한구석이 쓸쓸했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절에도 이별이 있고 아픔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왕년에는 나름 반짝이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친구들과 함께 세상의 중심인 적도 있다고 토닥여 준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 소설 속 ‘나’와 친구들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느꼈던 유대감이 우리들에게 어떤 형태로는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힘들어하는 어른들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힘을 내고 잠시 숨 고르기의 시간을 가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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