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이 반가웠다. 나는 문학에 관해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정도와 대중들이 대부분 아는 정도의 수준이다. 사실 이번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 한강작가를 알게 되었다.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으로 브런치의 메인 글들은 한강작가와 관련된 글들로 채워졌고, 방송과 동네책방 피드에도 한강작가에 대한 소식들이 올라왔다. 한동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강제적으로 한강작가의 정보들을 흡수하는 시간들이었다.
우리 집 책장에 10년 전부터 한강작가의 채식주의자 책이 있었다. 내가 사놓은 책은 아니니 남편이 읽었나 보다 생각했다. 나와 남편의 책취향은 정말 다르다. 책장에서 남편의 책과 나의 책을 나누어 두지 않아도 한눈에 누구의 책인지 알 수 있다. 남편은 종교, 심리학, 마음 다스림, 철학 등에 관심이 많다. 암을 만나기 전 내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이었다. 나의 책들은 베스트셀러책들이나 실용서, 자기 개발서 등이었다. 간혹 여행책들도 있었지만 아주 많은 부분들은 공예 관련책이다. 내가 관심 있어하는 것들에는 남편은 관심이 거의 없었다.
한강작가의 인터뷰영상을 보고 친구가 생각났다. 말하는 모양새와 조심스럽지만 단어의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친구와 닮아 보였다. 그때부터 한강작가의 영상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동갑내기 친구
늦은 나이에 만나 친구가 된 대학원동기다. 우리는 동갑이었다. 대학원입학을 하고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나이와 이름, 현재 하고 있는 일이나 관심 있는 것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 등을 말했던 것 같다. 문화예술경영을 공부하는 곳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예술 관련일들을 하고 있었다. 극단을 운영하는 분도 있었고, 오케스트라 단원이거나. 배우, 연주자, 문화예술기획자, 무대감독등 다양한 문화예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도 나에 대한 소개를 했다. 그 친구의 소개는 간단했지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문화예술을 좋아하고, 현재하고 있는 일이 마트에서 어묵을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 친구와 나는 동갑이었으니 그때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시간이 꽤 늦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피곤이 몰려왔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을 가야 한다. 건물을 나와 첫 계단을 밟으려고 할 때 뒤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돌아보며 "저요?"라고 했던 것 같다.
"네, 저랑 동갑이시던데 친구하고 싶어서요"
"아~ 네 좋아요"
"전 이미현입니다"
"전 박귀선이에요"
이후 몇 마디를 나누고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호칭은 미현쌤, 귀선쌤으로 하기로 했다.
이후 우리는 같이 팀 과제를 하게 되었다.
지역의 도시재생과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것이었고, 나는 아는 곳이 없다고 하니 미현쌤이 관심 가는 곳이 있다고 했다. 윤동주의 문학관이었다.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은 서울특별시종로구에 있는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문학관이다. 종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폐기된 상수도 가압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었다. [1] 2012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위키백과)
윤동주 문학관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우리는 하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에게 윤동주 님은 내가 알고 있는 좋아하는 시중의 하나이고 교과서로 익숙하고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 정도만 아는 정도였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 시집은 읽어보았고, 책장에도 작은 시집이 한 권 있긴 했다. 하지만 윤동주 님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관심을 가져본 것은 처음이었다.
미현쌤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참 재미있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미현쌤 국문과를 졸업했고, 대치동에서 오랫동안 잘 나가던? 국어강사로 일하다 회의를 느껴 그만두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마트등에서 단기알바를 하면서 좋아하는 공연이나 연주회를 보러 가고 매달 독서토론회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함께 했다. 미현쌤과는 왠지 어른 친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미현쌤에게 암이 찾아왔다. 폐암 4기 그것도 말기라고 했다.
어느 날 미현쌤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고, 우리가 함께 준비했던 영화제를 하면서 찾았던 평창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해발 700m에 있는 곳이었다. 산속에 있는 숙소였다.
영화제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숙소였다. 미현쌤과 2박 3일의 시간을 보내면서 매일 아침 숲길 산책을 하고,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다시 산책을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나의 생활과 비슷했다.
읍내에서 장을 봤다. 미현쌤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해서 통밀빵을 사고, 야채들과 토마토, 사과를 샀다. 메밀전병이 먹고 싶다고 메밀전병도 포장했다.
포장해 온 메밀전병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든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집에서 준비해 간 된장으로 간이 약한 된장국을 끓이고, 드레싱 없는 샐러드를 만들었다. 현미와 잡곡이 많이 든 밥을 했다. 건강식빵을 만드는 곳에서 산 통밀빵에 야채들을 올리고 미현쌤이 준비해 온 작은 씨앗 같기도 곡물 같기도 한 것을 토핑으로 올렸다. 항암에 좋다고 하니 먹고 있다고 설명해 줬다. 간은 거의 되지 않은 샌드위치가 완성되었고, 녹차를 우려 작은 밥상에 앉아 같이 먹었다. 미현쌤은 "맛이 없어서 미안해요"라고 했다. 나는 "건강한 맛이라 괜찮아요"라고 했다.
우리는 웃으며 소박하고 맛은 없지만 건강한 맛의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정리를 했다. 간소하게 준비한 밥상이라 정리할 것도 많지 않았지만 미현쌤은 같이 하자면서 밥상을 닦고, 바닥을 정리했다.
밥을 먹고 나면 숲길산책길을 산책한다. 걷기 좋은 산책길인데 돌아오는 길에는 미현쌤이 조금 힘들어 보였다. 방에서 잠시 쉬었다가 발코니로 나가 풍경을 구경했다.
"귀선쌤, 나 담배 펴도 될까요?"
"쌤 아직 담배 펴요?"
"예. 폐암 말기인데 한심하죠?"
"아뇨, 그건 아니지만... 괜찮아요?"
"끊으려고 하니 스트레스가 심해서 대신 많이 줄이긴 했어요. 하고 싶은 거 참는 것보다 이게 나을듯해서요"
" 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전 괜찮으니 피세요"
해발 700m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싸인 멋진 풍경을 보며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맛있게 피우던 쌤이 피워내던 담배연기가 예뻤다. 나는 담배연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미현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날밤 우리는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이야기를 했다. 미현쌤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다. 미현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미인이지도, 화려하게 외향을 꾸미지 않았다. 하지만 단정한 모습의 미현선생님이 그날밤은 신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미현선생님은 정말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섹시하기까지 했다.
"쌤, 제 눈이 이상한가요? 왜 선생님이 엄청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귀엽고, 섹시하게 보이죠? 나 반한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 제가 맘먹으면 좀 그래요. 특히 가방끈 긴~~ 남자들이 잘 반하죠?"
"어떻게요?"
" 음. 처음엔 저한테 누구도 관심이 없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제가 맘먹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 저한테 관심을 가지죠."
"오~~~ 우리 미현선생님 마성의 매력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네"
"그런가?"
"선생님, 선생님은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이건 엄청난 재능낭비예요 그런 말 듣지 않아요.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제 대학동기 중에 비슷한 말을 하긴 하는데.. 표현이 좀... "
"뭐라고 해요? 궁금해요."
"넌 먹기만 하고 싸질 않아. 언제 쌀래? "
" 하하하.. 진짜 딱 맞는 표현인 듯. 쌤은 정말 책도 많이 읽고, 여러 가지 경험들도 많으니깐 그리고 말도 이렇게 재미있게 하고 참, 쌤 국문과잖아요"
"작가가 되고 싶어서 국문과에 갔는데.. 이러고 있네요"
"쌤은 그림도 좋은데 글을 써요"
그때 우리는 하루에 한 장 그림 그리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손바닥만 한 종이에 매일 한 장의 그림을 그리고 카톡으로 서로 올리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각자의 시간이 지났다.
당시 미현쌤은 항암치료도, 수술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4개월이나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했다.
통증을 줄여주는 마약성진통제를 처방받는 정도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거의 모든 것들을 하지 못할 정도의 컨디션이지만 독서토론회는 컨디션이 좋을 때면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서울에서 한번 더 선생님을 만났다.
아버지가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해서 곧 용인으로 이사를 한다고 했다. 이사 후에 몇 번의 통화를 했다. 암증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병원에 입원을 했고 종종 통화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문자나 톡을 남겨두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담담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대학원 동기를 통해 미현썜의 소식을 들었다. 쌤은 그렇게 떠났다.
대학원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영화제에 우리는 영화 한편씩 추천하고 소개를 했다. 미현쌤은 소공녀를 추천했다. 미현선생님이 소공녀의 주인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나의 친구와 닮았다.
나는 죽음을 대하는 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은 누구나에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하지만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만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