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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언맨 May 30. 2017

증산공원에서 이바구길을 거쳐 상하이 거리까지

갈맷길 3코스 2구간

갈맷길 3코스 2구간 중 부산진시장에서 상하이 거리까지


길을 잃어버렸다. 예기치 않은 일도 여행의 일부라지만 30여분을 헤매다 보니 짜증스럽다. 갔던 길을 다시 오고, 왔던 길을 다시 가고 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니 열이 오른다.

오늘 걸을 길은 부산진시장에서 시작한다. 종착지는 미정이다. 발 닿는 대로 가다가 멈추고 싶은 곳에 멈출 것이다. 다만 다음 걸음을 위해 대중교통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멈출 것이다.


정공단

진시장 출발하여 10여분 되었을까, 정공단이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걸고 부산진성을 지켰던 정발장군을 기리는 곳이다. 정공단 정문 앞 계단에 엎드려 있는 멍멍이가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는 마치 안내인이라도 되는 듯이 정공단 대문을 들어서는 길에 따라 들어오며 꼬리를 흔든다.  혹 정공단에서 멍멍이가 가까이 다가와도 무서워하지 마시라.



정공단을 지나고 나서 갈맷길은 오르막으로 들어선다. 역사가 깊은 부산진교회와 부산일신여학교 앞을 지나 증산 공원까지 오르막이다. 증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서 한쪽으로는 부산항이 내려다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수정산이 비스듬히 올려다 보인다. 수정산 허리를 돌아가는 길이 산복도로이다.   


증산

증산은 원래 부산진성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정발 장군이 진성을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한 곳이다. 이 곳이 부산진 母城이었고, 현재 자성대가 있는 곳이 子城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진성을 허물고 왜성을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왜성의 특징이 남아 있다. 조선의 성벽은 수직으로 세워졌지만 왜성은 가파른 경사가 지도록 축조되어 있다.



넉점반

증산공원을 내려와 산복도로로 향하는 길 벽에 재미있는 동시가 그려져 있었다.

"넉점반"


아기의 순진무구함에 미소가 씩익.

아이들의 꾸밈없는 세계에는 시간이란 게 없는가 보다.

어른들이 시간을 아껴라, 아껴라 하는 것은 이미 때 묻은 마음의 소치 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흐르는 시간에 절로 자신을 맡겨 놓고 자연스레 흘러가는 자연, 아이들은 그 자체로 자연 인 고로 흐르는 시간에 연연해하지 않는 걸까?


인생이 갖은 염려로 마음이 짓눌린 사람들은 차라리 시간 밖으로 나가서 좀 쉬어주는 것이 어떨는지,

찰나에 불과한 인생 좀 쉬어가는 거나 바쁘게 살아가는 거나 결국은 그것이 그것일 텐데,

어찌 그리 바쁘게 살아가는지, 자신의 존재도 모르고 주위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는 메마름이 아쉽다.

아이처럼 살아가는 그런 때


유치환 우체통

청마 유치환 선생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 수정동이었나 보다. 유치환 선생은 부산 경남여고와 부산남여상(현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교편을 잡으시다 퇴근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유치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부산항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곳에 유치환 우체통을 만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이 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 자신에게 배달된다고 하는데, 난 미처 편지를 쓸 생각은 못하고 아래층 시인의 찻집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로 더위를 식히며 통유리 너머로 부산항 대교 앞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더랬다.


불쑥 유치환 선생의 시 "행복"에 나오는 우체국이 바로 이 장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환 선생이 평생 사랑했던 이영도 여사와의 인연을 생각하니, 그의 시 "행복"은 이영도 여사에게 보내는

한 편의 시였음을 깨닫는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려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오늘도 나는...

유치환 선생이 이영도 여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 20년간 날마다 지속되어 오던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려다 뵈는...

유치환 우체통이 서 있는 이곳에서 내려다본 부산항,

사실 유치환 우체통 아래층에 있는 차집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으로 더위를 식히면서

통유리 밖으로 부산항을 내려다보니,

시인이 말한 에메랄드 빛 하늘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유치환 선생은 날마다 우체국에 들어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창문 앞에서 이영도 여사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의 사랑을 에메랄드 빛처럼 투명하게 숨김없이 사랑을 편지에 내려놓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이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편지가 만일 유치환 선생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쓰였더라면, 이 보다 극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잠시 허망한 생각을 해 본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란 말은 선생에게는 야만적으로 들렸으리라. 선생은 그저 사랑할 수 있음에 행복했던 진정한 로맨티시스트였다.  



유치환의 우체통을 떠날 때 뭔지 모를 아쉬움에 뒤돌아 보니 '편지 쓰는 곳'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정체 모를 아쉬움이 뭔지 느꼈다. 잠시 망설이는 발걸음은 다음을 기약하자는 마음에 굴복하고 말았다.  


유치환 우체국에 이어진 길은 스카이 웨이 주차장 위로 난 싱그러운 숲길이었다. 부산항이 내려다 보이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 노트를 꺼내 들었다. 풀리지 않는 아쉬운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난 시인에게 한 줄 시라도 남기고 싶었다.


...

난 뭔가 한 두 글자를 끄적였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아련한 그리움만이 압도할 뿐, 그저 앉아서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자체가 시로 충분하였다.  


이바구 공작소와 이바구길

지난 일들은 모두 간직하기도 어렵거니와 모두 잊어버리기도 아쉬운 법이다. 부산항을 앞에 두고 누운 수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한 민초들, 이들의 걸음 하나하나가 길이 되고 드디어는 수정산 복부를 가로지르는 산복도로가 생기기에 이르렀다. 잊혀 가는 이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남기고자 이바구 공작소에는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들을 전시하고, 마을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전시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70~80년대의 복구풍 교복을 입고 스스로 경험해 보지도 못한 지난 시절의 추억과 향수에 젖어 본다. 이바구 공작소 아래 골목에는 주말마다 옛 교복을 입은 젊은 청춘들이 북적인다.


128계단

이전에는 상하를 이어주는 생활의 통로였던 길, 128계단이 오늘에 이르러 관광지가 되었다. 한쪽에는 모노레일이 다니고, 옛 분위기를 느껴보려는 청춘들은 쌍쌍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이바구길 입구에는 산복도로에 얽힌 민초들의 이야기가 그림과 시가 되어 벽에 전시되어 있다.  

잊혀 가는 것들, 잃어져 가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몸짓들.



이 날의 걸음을 부산역 앞 차이나 타운에서 끝이다. 5시간의 걸음을 끝내는 마당에 차이나 타운의 중국집에 들어 물만두 한 접시와 볶음밥 한 그릇으로 시장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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