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죽음을 생각하라. 그리고 삶을 생각하라.

그 책, 그 문장/레오 니꼴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아이새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살금살금 아버지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는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 부딪쳤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오 니꼴라예비치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작과 비평, 117p.



재능이 충만한 작가들은 마치 어떤 인물의 삶을 살아본 것처럼 쓴다. 훌륭한 배우들이 펼치는 최고의 연기를 볼 때와 비슷한 경탄을 자아낸다. 나는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꽤 알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서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인물로 살아본 것처럼 삶을 실감나게 묘사한 작품은 많이 보았지만, 죽어본 것처럼 죽음을 이토록 실감나게 그린 작품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톨스토이가 망자와 인터뷰해 본 적이 있거나, 언젠가 한 번 사망한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구성은 단순하다.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장 분위기를 조금 보여주고 나서, 이반 일리치의 온 생애가 시간 순서에 때라 일목요연하게 요약되어 있다. 아주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주제도 선명하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자칫 너무나 뻔한 이야기가 그려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니다. 시선을 유혹하는 신비한 이야기 하나 없이 담담하게 한 인간의 전체 삶을 조망하면서도 전혀 식상하지 않다. 천재적이다.

사람들은 삶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급급하게 현실을 살아가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다. 생활의 총합이 삶이라고 결론을 짓는 듯하다. 하지만 온 신경을 쏟으며 보내는 하루하루의 구성 요소들 중에서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말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거짓말과 거짓말이 아닌 것으로 분류해 주는 장치라고 말이다. 심판의 날, 하느님이나 염라대왕의 앞에서 우리는 살면서 추구했던 모든 가치들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반 일리치가 살아생전 그토록 만족했던 직책과 연봉, 아름다운 집, 사람들과의 관계 등은 죽음 앞에서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이 거짓말로 메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잊고 있었던 것들의 가치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지켜주고 버텨주는 소중한 가치이며, 죽음 앞에서도 이반 일리치에게 위로가 되는 진실한 가치다.

첫 번째는 친절이다. 배변을 위해 부착된 특수 용변기를 치우는 일을 도와주는 농부 출신의 젊은 하인 게라심은 진심을 다해 이반 일리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다리를 높이 들어주면 고통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의 다리를 어깨에 메고 말동무가 되어 준다. 때로는 거의 밤새도록 함께 해 주기도 한다. 그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주인을 진정으로 가엽게 생각했다. 한 번은 이반 일리치가 힘이 들 테니 그만 가라고 하자 게라심은 “우리 모두 언젠가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게라심의 말에는 자신이 죽을 때에 또 다른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첫 번째 진실한 가치는 연대를 바탕으로 하는 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이반 일리치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밤새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몸부림치면서 신에게 따져 묻는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이냐고 말이다. 그는 살면서 좋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느껴진다.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지만 모두 덧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만은 여전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마지막은 동정심이다. 이반 일리치가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 그는 절망 속에서 필사적으로 두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고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김나지움(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려고 막 도착한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빛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제대로 된 건 아니지만 아직 그걸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소리치며 임종을 맞이했다. 위에서 인용한 소설의 일부가 바로 이 부분이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는 45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현재 내 나이와 같다. 가능하면 나는 이반 일리치보다 좀 더 일찍 참된 가치를 깨닫고 싶다. 방법은 있는 것 같다. 바로 지금이 내가 죽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개선장군의 뒤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외치는 노예가 있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로마인들도 죽음 앞에서는 승전의 영광도 부질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소설 초반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아버지가 제복을 사준다. 최고급 샤르멜 양복집에서 옷을 맞추고 장식용 메달을 달게 된다. 그런데 그 메달에 라틴어로 쓰인 글귀는 “마지막을 예견하라”였다. 다는 그는 그 글귀를 까맣게 잊고 살았을 뿐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반 일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삶 자체보다는 살아가는 과정에만 눈을 돌린다. 돈 생각, 집 생각, 일 생각, 놀 생각 등에 빠져서 살아간다. 대부분은 죽음을 잊고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삶을 잊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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