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의 악필 편지
남자친구가 게임을 하는 것에 화가 난다는 당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더 알고 싶어요. 남자친구와 전화를 할 때 들리는 키보드 소리, 게임 속 길드원들과의 약속 때문에 밀리는 당신과의 약속… 그 상황에서 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기에 화가 났던 걸까요?
우리는 감정을 반사적인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감정에는 인지와 생각이 앞서 일어나지요. 예컨데 화날 상황을 마주한다면 그 상황의 맥락을 파악하고 나서, 그 상황이 내가 화가 날 만한 상황임을 판단한 후에야 화가 납니다. 원효대사도 한밤중에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기에 해골물을 달게 마실 수 있었을 거예요. 아침에 일어난 후에 상황을 인지할 수 있게 되자 역겨운 감정을 뒤늦게 느꼈을 테고요.
그렇다면 남자친구에게 화가 났던 당신도 그 상황이 화가 날 만 하다는 생각과 판단이 있었기에 화가 났겠지요. 같은 상황이더라도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감정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의 밑바탕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당신이 느낀 감정이 왜 하필 화였는지도 알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러면 감정의 이면에 숨은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분노는 나 또는 누군가가 부당한 행동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비롯해요.¹ 화를 낸다는 것은 그 부당함을 바로잡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남자친구에게 냈던 화는 이런 뜻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너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그걸 확인하고 싶어. 그러니 내 앞에서 너는 내게만 집중해야 해.’
아마 게임에 빠져드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고 당신은 남자친구가 게임을, 그리고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화가 났을 거예요. 항상 남자친구의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 당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거니까요.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해 보세요. “나는 네 여자친구이고, 네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싶어. 그래서 네가 게임을 할 때 내게 집중하지 않는 것이 네가 다른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느껴져 화가 나.” 이렇게 말하고 나면 당신은 게임 때문에 말싸움을 벌인 것보다 조금 더 중요한 문제에 가닿을 수 있을 거예요. 화라는 감정 뒤에 숨은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지요. 당신이 남자친구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충분히 느꼈고, 그래서 당신의 욕구가 충분히 채워졌다면, 당신은 남자친구가 게임을 한다고 지금처럼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물론 당신과 남자친구의 관계가 제가 넘겨짚은 만큼 단순하지는 않겠지요. 제 생각과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감정의 비바람이 지나간 지금, 그 자리에 남아있을 생각의 그루터기를 당신이 알아 주시기를 바라요.그 뿌리의 깊은 곳에는 당신조차 몰랐던 당신의 목소리가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이, 당신이 감정을 성숙하게 다루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저는 믿어요.
¹ 마사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강동혁 옮김, 뿌리와 이파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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